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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Aug 01. 2018

23. 도시에서 들켜버린 장기 여행자의 속내

2017.5.17. 살타, 아르헨티나(D +100)

나 역시 여행을 떠나오기 전 부러워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멋지게 사표를 던지고 모험을 택한 사람들, 쉽게 하지 못할 긴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 그러나 그들을 보며 가끔은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대체로는 장기 여행의 감동이나 행복 같은 것들만 들을 수 있었으니까. 묻고 싶었다. 힘든 적 없었냐고, 보이지 않는 그 다음이 무섭지는 않았냐고.




안데스 산맥을 따라 여러 나라를 넘나들며 정말 많은 도시를 지났다. 개중에는 말이 도시지 작은 마을이란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곳도 있었고, 규모는 있지만 어딘가 예스럽고 투박한 것이 시골의 읍내 같은 느낌을 주는 곳도 있었다. 물론 그곳에서는 그게 좋았지만, 그럼에도 뼛속까지 도시 생활에 익숙한 나는 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사실 도시를 계속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르헨티나 북부 관광의 중심지인 살타(Salta)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스페인스러운 도시라고 불린다는 곳이다. 사방으로 끝없이 뻗어나가는 넓은 도로, 아름답고 유서 깊은 근대 풍의 건물들과 교회, 커다란 상점과 예쁜 카페, 밤이 늦도록 꺼지지 않는 불빛들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야경. 걷기만 해도 여행지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오는 곳이자 내가 정말 사랑하는 도시의 풍경이었다. 게다가 그간 안데스 산맥의 건조한 고산지대의 생활이 길어졌던 터라 수분을 가득 머금은 아침 공기를 마시며 이슬이 내려앉은 아침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비록 아무리 빨래를 널어놓아도 마르지 않는 덕에 가끔은 눅눅한 양말을 그대로 신어야 했지만.


오랫만에 만끽하는 화려한 도시의 밤!
호스텔 근처의 작은 구멍가게 수퍼마켓도 이렇게 밝고 아름다웠다.


살타에서 머물렀던 띠에라 노르떼 호스텔(Tierra Norte Hostel)은 시내 중심가에선 살짝 떨어져 있지만 시외버스 정류장, 그리고 케이블카 명소와 가까운 곳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기념품조차 부피가 크면 하나 사질 않았고, 쓰다 닳은 물건은 버리기 일쑤였음에도 이상하게 우리의 짐은 계속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왠지 이건 기분 탓만으로 넘기기엔 진짜 무거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위치적인 부분 외에도 호스텔은 꽤나 가족 같은 분위기가 편안하고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여느 곳들과 비슷하게 여기도 스텝은 대부분 숙소를 제공받는 자원봉사의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특히 이곳은 지금까지 들렸던 다른 곳들보다 그렇게 머무는 여행자들이 많아 보였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가 도착하던 날 리셉션에서 맞아 준 앤 해서웨이를 닮은 키 크고 눈이 예쁘던 검은 머리의 여자애, 짧은 단발머리에 뿔테 안경이 인상적이던 통통하고 귀여운 여자애, 키가 크고 살집도 있어 늘 눈에 잘 들어오던 덩치 큰 남자애, 배웠던 살사 스텝을 기억하지 못하고 발이 꼬여가는 나에게 못 참고 손을 내밀었던 수염 덥수룩한 남자애 등이 모두 스텝으로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했다.

 

살타는 야경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한 곳.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에 가기로 했다.


살타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장을 봐서 밥을 해 먹고 그저 시내를 배회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어느 저녁, 이 훌륭한 관광지에 왔으니 역시 그 의무를 다 해야 한다며 야경을 보러 가기로 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마침 이날은 여행을 떠나온지 딱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호스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미라도르(mirador,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가 운행하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도시에 와서 그런 걸까, 언제부턴가 여행이 아닌 일상처럼 하루를 보내다 보니 이런 걸까.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데 왜인지 언젠가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을 오르던 직장인 시절의 내 모습이 문득 생각났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살타의 야경은 정말 멋있었다. 계획된 도시라선지 모든 도로는 바둑판 식으로 쭉쭉 뻗어있었는데 그 사이를 촘촘한 노란 불빛들이 반짝이며 메우고 있었다. 서울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하늘을 천천히 물들이는 노을처럼 은은하게 감싸오는 분위기가 있었다. 케이블카에도 전망대에도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는데 그나마 있는 사람 중에는 그냥 현지인 같은 사람들도 꽤 보였다. 그래선지 또 서울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내가 떠올랐는데, 그때의 나와 비교해보니 지금의 나는, 자유롭지만 여전히 어딘가 초라했다. 많이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얽매이는 부분이 있었다. 

매일같이 빨래를 해도 이제는 꼬질한 기분이 드는 똑같은 옷과 신발을 몇 달째 신고, 화장 따위는 생략한 지 오래, 좀 더 오래 다니기 위해 무조건 아껴야 한다고 1~2천 원 차이에도 벌벌 떨며 선택을 고민하던 나. 외형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쓸데없는 눈치볼 필요가 없다는 것도 이제 아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나만의 어떤 잣대를 세워두고 자유롭지 못한 나.

저 멀리 일상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부러워하고 있고, 그 현실에서 빠져나온 나도 스스로 매일이 즐겁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떠나온 명확한 목표를 잃어서일까? 목표라는 건 꼭 있어야 하는걸까? 과거의 지쳐있던 일상보다 더 아름답고 여유롭고 행복하게 다녀야 할 이 먼 곳까지 와서 뭐 때문에 이렇게 덜덜거리고 있는 건지. 내가 느끼고 싶던 자유란 진짜 어떤 것이었는지. 


괜한 오기가 생겨 마치 카누 인스턴트커피라 해도 믿을 것 같은 편의점 커피를 무려 40페소(한화로 당시 약 3,200원)나 주고 사 마셨다. 원래의 나라면 당연히 이런 곳에서 이랬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면서 말이다. 아르헨티나에 넘어온 뒤론 점심을 20페소짜리 핫도그로 때우는 날도 있던 내게 이건 정말 마음먹고 한 과소비였다. (물론 그 핫도그가 정말 푸짐하고 맛도 있었기 때문에 맨날 먹었다는 사실은 모른 척하겠다.) 그래도 그건 따뜻한 커피 한 잔 손에 들고 호호 불어가며 바라보는 살타의 야경이 한 때 남산 꼭대기에 올라 소중한 사람과 함께 바라봤던 서울의 야경만큼이나 내게 다정하고 귀하길 바랬던 마음의 사치 같은 것이었다.  


도시의 야경이 아름다운 이유는 야근하는 사람들 덕분이라던가;; 어둠이 내려도 꺼지지 않던 도시의 노란 불빛들이 만들어내던 장관.


그날 밤 호스텔에 돌아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은 여행 중 나도 모르게 아쉬운 채로 보내버린 나날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이내 그 생각의 끝은 언젠가 끝이 날 내 여행으로 향했다. 돌아간 현실에서 과거의 그때처럼 나는 또다시 남산에 올라가 야경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을 생각하며 한뼘의 후회도 없을까, 걱정 없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 마시며 행복해 할 수 있을까.  

시계는 어느새 새벽 2시가 넘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려고 잠시 일어났는데 야간 스텝이 홀로 호스텔을 지키며 복도의 TV를 보고 있었다.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그 애는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을 돌다가 여기 살타까지 짧지 않은 여행을 떠나온 길이었다.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선지 그 표정이 마냥 행복하게만 느껴졌다. 괜찮다고, 앞으로 다 잘 될 거라고 했다. “No voy a dormir!” 영화 속 꼬마가 외쳤다. 잠이 안 온다고? 이거 딱 지금 내 이야긴데? 겨우 알아들은 한마디 대사로 한 농담에 우리는 같이 웃었다. 그리고 참 사랑스러운 영화라고 그 아이는 대답을 했다.

그렇게 알게 된 영화의 제목은 Finding neverland. <피터팬>의 작가 제임스 베리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네버랜드를 찾아서’라는 작품이었다. 스페인어로 더빙이 된 그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없는 와중에도 죽어가는 케이트 윈슬렛을 위한 영화 속 인물들의 작당에 나까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여행에는 즐거운 순간이 더 많다. 이때가 아니면, 떠나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을 일들을 겪고 또 해내게 된다. 왜일까 그럼에도 가끔씩 이렇게 알 수 없는 걱정에 휩싸여 움츠러들고 마는 순간이 찾아 오는 이유는. 

<피터팬>의 잠이 오지 않는다던 아이는 그 덕에 피터팬을 만나 멋진 모험의 세계로 떠날 수 있었다. 잠 못 이루던 나의 어떤 시절은 지금의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했다. 이제 잠이 오지 않는 나는 또 어디로 떠날 수 있을까. 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그때는 행복할까, 지금 여기선 무얼 해야 하는 걸까. 꼭 뭔가를 해야만 하는 걸까. 그렇게 결론도 못 내고 고민만 많아지던 새벽이 있었더랬다. 고민 때문에 잠을 못 자다니, 여기나 거기나 도시란 원래 다 그런 곳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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