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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Aug 14. 2018

27. 남미에서 버스를 탄다는 것

2017.6.6. 리우 데 자네이루, 브라질(D +120)

“우리나라? 수도인 서울에서 가장 먼 도시 중 하나인 부산까지 버스로 5시간 정도 걸려.” KTX를 타면 3시간 정도로도 충분할 텐데 이곳에선 본 적 없는 고속열차를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나 애초부터 이 대화에서 빠르기는 딱히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아, 겨우! 한국 엄청 작구나?” 그 친구는 콜롬비아 인이었다. 그렇지, 작지, 엄청 작지…. 아니, 근데 너네가 너무 넓다는 생각은 안 해봤니? 덜컹거리는 버스에 하루 종일 몸을 맡겨야 했던 그 숱한 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남미에 와서 처음으로 탄 버스는 페루의 리마(Lima)에서 와라즈(Huaraz)로 향하는 버스였다. 멋도 모르고 낮 2시 버스를 탔는데, 밤 10시가 훌쩍 넘어서 도착했으니 하루 종일 이동밖에 한 것이 없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카(Ica)에서 쿠스코(Cusco)로 가는 길은 10시간을 훌쩍 넘겼다. 아직 해가 남아있던 오후에 버스를 탔는데 다시 땅에 발을 디딘 건 다음날 이미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쯤이었다.

워낙 땅덩이가 넓기도 하고, 높고 굴곡진 산길이 많아 교통수단으로 버스가 많이 발달해있다는 남미는 그래서 다행히도 좋은 버스가 꽤 있다. 마치 비행기처럼 버스 안에 승무원까지 타고 있는 버스들이 이런 데에 속한다. 승무원은 버스를 돌아다니며 승객이 안전벨트는 잘 메고 있는지, 불편한 것은 없는지 살피고, 때가 되면 식사나 간식을 나누어 주기도 한다. 페루의 유명한 크루즈 델 수르(Cruz del Sur) 등이 대표적인데, 이런 버스는 그들만의 정류장도 따로 가지고 있어서 지도를 볼 때 일반적인 버스 터미널이 아닌 버스 회사의 이름이 붙은 터미널을 찾아야 한다.

밤을 꼬박 달려야 하는 야간 버스가 많다 보니 좌석이 좋아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남미 버스의 등급은 대체로 좌석에 따라 달라지는데, 좌석의 등받이가 뒤로 젖혀지는 정도에 따라 거의 일직선으로 침대에 가깝게 펴지는 좌석을 까마(Cama, 침대라는 뜻이다), 까마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100도 이상으로 젖혀지는 좌석을 세미까마(Semi cama, 반만 침대라는 뜻이다)라고 부른다. 2층 버스도 많은 이곳에선 버스 한 대가 까마와 세미까마 좌석을 같이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으니, 좌석마다 금액이 다르다면 선택한 것이 어떤 좌석인지 확인해보는 것이 좋다.

처음엔 나도 그랬다. 기왕 다닌다면, 게다가 그 안에서 잠도 자야 한다면 좋고 편한 것을 타고 싶어 유명한 버스 회사의 까마를 선호했다. 페루에서 주로 이용했던 크루즈 델 수르는 정말 비행기라도 되는 듯 좌석마다 화면도 달려 있어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볼 수도 있었다. 좋은 버스일수록 경비도 삼엄해 치안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크루즈 델 수르는 표를 살 때와 탑승할 때마다 일일이 여권을 검사하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


첫번째 사진은 영화를 보다 저녁식사를 받았던 크루즈 델 수르의 좌석에 앉아서. 나머지 둘은 각각 볼리비아와 아르헨티나의 버스안 모습.


버스로만 이동 가능한 구간이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보통은 페루의 리마-쿠스코라든가, 볼리비아의 라파즈-우유니,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이과수 구간 등은 비행기를 이용하는 여행자가 많다. 멀기도 하지만 길이 거칠고 위험한 곳도 많기 때문이다.

아, 잊고 넘어갈 뻔했는데 이곳에서 버스를 타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중간에 내리는 승객들이 짐칸의 내 캐리어를 가져갈 수도 있다는 말부터 버스가 통째로 강도를 만나 털리고 심지어 인명사고가 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특히 이카-쿠스코 구간의 버스 강도 이야기는 벌써 몇 년 전 사건이라는 데도 여행자들 사이에서 유명세가 자자해 많은 이들의 노선을 비행기로 바꾸게 했다. 직접 겪은 일은 아니었지만 버스를 타고 다니던 동안 그 안에서 여권이 든 가방이나 핸드폰 등을 잃어버리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시간이 많다는 건 참 좋은 말이지만, 당시 우리 같은 경우엔 아닐 수도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건 시간을 줄일 수 있는 여비라든가, 미리 준비해둔 계획이라든가, 그런 류의 다른 방도가 없었다는 말이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이과수로, 이과수에서 리우 데 자네이루로, 각각 이동하는 데만 꼬박 하루씩이 소모됐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 다음 목적지인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파라과이까지도 버스 안에서 거진 하루를 보내야 했다.

언제부턴가 좋은 버스, 나쁜 버스, 혹은 까마, 세미까마, 그냥 일반 좌석을 가리지도 않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시간대가 가장 적절하면서 저렴한 버스를 찾아서 다녔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이젠 불편하지도 않았고, 위험할까봐 불안하지도 않았다. 그냥 이곳에선 모두가 이렇게 타나 보다 생각하니 몸도 거기에 맞춰 적응했던 모양이다. 볼리비아에선 그래서 정말 심한 버스도 많이 탔지만,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선 그래도 대부분의 버스가 적당히 몸을 뉘어 편하게 갈 수 있을 정도였다.

파라과이의 국경 마을인 씨우다드 델 에스테(Ciudad del Este, 동쪽의 도시라는 뜻이다)까지는 약 20시간이 걸렸다.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상파울루까지 약 7시간, 터미널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며 2시간 대기 후 버스를 갈아타고 다시 12시간을 달렸다. 버스를 탈 때 좌석의 선택권이 있다면 주로 2층의 앞자리를 선호하곤 했는데 발 뻗기도 좋고, 우리나라에선 경험하기 쉽지 않은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저 눈 앞이 탁 트여 있는 것이 좋았다. 야간 버스인 경우엔 맞은편에서 오는 차의 불빛 등으로 인해 수면에 방해를 받을 수도 있어 사람들이 잘 선호하지 않는 자리였다는 건 아주 늦게야 깨달았다. 물론 90도로 꼿꼿이 서서 젖혀지지 않는 좌석에 앉아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잠들었던 내게 눈앞의 불빛 따위는 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도 아니고 마을 외곽 주유소에서 기다렸다가 탄 볼리비아 버스. 심지어 짐칸을 안 열어주어 캐리어를 다 들고 올라탔다.
크루즈 델 노르떼(Cruz del Norte) 볼리비아 우유니에서 칠레 아타카마로 넘어갈 때 많이 이용하는 버스.



언젠가 여행이 끝나갈 때쯤, 태평양 바다를 바라보며 저 반대편에 내가 사는 곳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함께 있던 콜롬비아 친구가 우리나라의 크기를 물었고 나는 버스를 타고 걸리는 시간으로 대답을 해주었다. 크기를 표현할 줄 몰랐으니 그건 내가 할 수 있던 아주 절묘한 대답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다시 이곳에 돌아와 현실을 살면서 생각해보니 적절한 비유였던 건지 잘 모르겠다. 10시간, 5시간, 3시간. 그건 거리 만큼이나 빠르기의 문제일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KTX까지 이야기 했더라면 아마 이들은 충분히 빠른데 왜 더 빨라지려 하느냐고 물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최고 속력을 60km도 내지 못하고 10시간을 달려야 하는 길이 널려 있는 땅. 버스에 있는 시간은 버려지는 아까운 시간인 것만 같았는데 늘 그렇지만도 않았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동행과는 10시간이 넘게 붙어 있어야 하는 버스에서 수다를 떨며 쉽게 가까워졌고, 혼자 이동하던 버스에선 옆자리 앉은 아주머니와 친해져 잠도 안 자고 더듬더듬 스페인어로 떠들어대기도 했다. 겨울에서 여름으로, 밤에서 새벽으로, 도시에서 시골로, 사막에서 초원으로 하루 만에 변하고 마는 변화무쌍한 풍경을 가만히 앉아 창 밖으로 바라본 적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오히려 딱히 다른 할 일이 없었던 버스 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모든 버스 안에서의 시간 역시 모두 잊지 못할 여행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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