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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Sep 08. 2018

34. 버킷리스트가 이뤄지던 밤

2017.6.19 코바카바나, 볼리비아(D +133)

장기 여행을 떠날 때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일정표? 장소에 대한 정보? 언어 공부? 비상약? 침낭?... 필요하다면야 준비할 것이 끝도 없을테고 또 사람마다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도 다를테지만, 내가 남미로 떠나면서 준비한 것은 크게 네 가지가 있었다. 첫째, 남미의 어떤 술도 달게 받아들이기 위한 나의 간건강 지킴이 간 영양제 밀크시슬. 둘째,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효과적으로 내 소개를 하기 위한 세계에 딱 30개 밖에 없는 직접 만든 명함. 셋째, 결국 한번도 제대로 꺼내보지 못했지만 바다너머 낯선 친구들에게 너무나 소개해주고 싶었던 우리의 전통놀이 고스톱. 그리고 마지막 네번째로 흥많은 이 땅 남미에서 언제 어디서든 모두와 어울리기 위한 나의 필살기, 바로 기타 연주다. 기타는 원래부터 취미로 배워온지가 좀 되었는데 실력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 그래도 여행을 앞두고 급하게 몇곡이라도 외워가겠다고 다른 준비를 할 시간도 모자란 판에 연습실을 들락거렸다. 다행이도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정말 예상치 못한 순간, 내게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왔다.




우유니를 갈 거라던 알레한드라와 안드레아는 태양의 섬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버스에 몸을 실었다. 루이스도 그날 밤 버스를 타고 라파즈로 떠났다. 혼자 남은 이반이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지만 거절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저녁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도 이반으로부터 계속 연락이 왔다. 놀자고. 캠프파이어를 하자고.

이대로 마지막을 보내기에 조금 아쉬운 밤이긴 했다. 그렇다고 딱히 다른 계획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미덥지 않았지만 못 이기는 척, 딱 한 시간만 놀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디에고라는 또 다른 콜롬비아노와 함께 있던 이반은 호스텔에서 기타까지 챙겨 오더니 가까운 가게에서 하나에 15볼 하는 커피맛이 첨가된 럼 Ron de café를 두 병 샀다. 그리고 호숫가로 가는 길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호객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조금 있다가 저기 호숫가에서 기타 치고 놀면서 캠프파이어할 거야. 너도 올래?"

낮부터 선착장 근처 식당 앞에서 메뉴판을 들고 있던 여자애 한 명이 우리 무리에 합류했다. 또 다른 친구의 가게가 문을 닫을 때까지 기다리며 이반은 길거리에서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호스텔과 식당이 즐비한 그 골목에서 일을 마친 아이들이 하나 둘 우리 곁으로 왔다. 대부분이 이곳의 아르바이트생이자 여행자였다. 여행지에서 그때그때 다양한 일을 하며 돈을 벌어 여행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걸 비로소 체감했다. 어두워질수록 걱정도 되었지만, 반대로 아이들이 많이 모일수록 혹시나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사라졌다. 7~8명이 모여 호숫가를 따라 불빛이 드문 마을의 가장자리까지 함께 걸어갔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티티카카의 밤풍경을 찍은 사진이 없었다.


남자애들은 가져온 나무도막과 종이로 불을 붙일 준비를 하고, 여자애들은 근처 호스텔에 들어가 커다란 보온병에 커피를 탔다. 함께 있던 무리 중 두 명의 여자애들이 머물면서 일을 하는 곳이었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 호스텔의 또 다른 녀석도 꼬시는 데 성공. 다 같이 밖으로 나가니 깜깜한 어둠 가운데 타오르는 불꽃이 보였다. 

대체로 이반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고, 나머지 아이들은 술과 커피를 돌려 마시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중간중간 사람들은 계속 합류했고, 모닥불을 둘러싼 원은 점점 커졌다. 영화 같은 데선 비슷한 장면을 봤던 것도 같은데, 실제로 경험해본 적은 없는 낯선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여행을 즐기는구나. 한국에선 해변가 헌팅은 경험했어도 이렇게 친구 하자며 즉석에서 둥글게 둘러앉아 볼 일이 없었다. 술보다는 음악과 분위기에 취해 친구가 되고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이반의 노래가 끝나면 그 잠깐의 적막을 파도 소리가 헤집고 들어왔다. 처얼썩, 처얼썩, 쏴아아아... 아무런 짠 내가 나지 않아 파도 소리가 없었더라면 여기가 물가라는 사실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소리가 들려오는 호수 쪽을 바라보다 다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의 그믐, 달빛조차 힘을 쓰지 못하는 어두운 하늘을 촘촘히 메우고 빛나는 별들. 타닥, 타닥, 타오르는 장작불과 노랫소리에 맞춰 별들이 느리게 춤을 췄다.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은하수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날 밤의 사진이 없는 관계로, 언젠가 우유니에서 찍었던 별밤 사진을 한장 올려본다. 그날밤 하늘의 별은 분명 이만큼 많으면 많았지 적진 않았다.


"한국엔 어떤 노래가 있지? 한국 노래가 듣고 싶어."

이반의 레퍼토리가 끝나갈 때쯤 누군가 불쑥 말했다. 설마 나에게 하는 소리? 역시, 나의 준비는 헛되지 않았어. 기어코 기타를 손에 잡을 날이 오다니. 그러나 막상 그 순간이 닥쳐오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난... 기타가 있어야 노래할 수 있어" 일단 허세를 부리며 이반의 기타를 넘겨받았다. 이젠 국적도 잘 기억나지 않는 여러 나라에서 모인 아이들이 다 나를 쳐다본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겨우 기타 줄을 튕기는데, 큰일이다. 아무것도 가사가 기억나지 않는다. 

제주도 푸른 밤. 여행을 준비하며 코드를 외웠던 몇 안되는 곡 중 하나. 짠내가 나지 않는 파돗소리가 함께하는 밤이라니 마침 이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리는 듯 하다. 가사가 기억나지 않는 부분은 죄다 '떠나요~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로 바꿔서 더듬더듬 노래를 불렀다. 

아무렴 어때 아무도 못 알아들을 텐데. 온 사방이 조용한 것이 모두 나에게 집중해선지, 아니면 내가 너무 긴장해서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던 건지 모르겠다. 아이들의 호응에 힘입어 다른 노래로 한 곡을 더 불렀다.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긴장이 풀어졌는지 이번에는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더 잘했다. 그렇게 이번 여행의 버켓리스트 중 하나를 의도치 않게 성공해냈다. 

불기운 때문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얼굴이 붉게 타오르는 것만 같은데 그 전까지 꿈같기도 했던 이 순간들이 자꾸만 생생해 온다. 그런걸 준비라고 하냐고, 어디 한번 해 봐라 그런다고 필요할 일이 있겠는지, 라던 말을 들으면서도 연습했었다. 그러길 잘했다, 정말 잘했다. 이때만큼은 스스로가 뿌듯했다.  



술도 커피도 떨어졌다. 어느새 불기운도 많이 사그라들었다.

"날도 추운데 마테차를 마시면서 마무리하면 어떨까?"

세상에 이런 건전한 마무리라니. 아르헨티나에서 왔다는 한 커플이 마테잔을 꺼내자 누군가가 비어버린 보온병에 다시 따뜻한 물을 끓여 담아왔다. 남미에선 마테차를 돌려 마시는 풍습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었는데, 우리는 그렇게 컵 하나에 수북이 쌓은 마테차를 보온병에 물이 다 떨어질 때까지 돌아가며 마셨다. 잔잔한 마무리였다.

축제가 끝났다. 남아있는 불씨를 밟아서 끄고, 각자의 호스텔로 돌아갔다. "너 한 시간만 있다 들어가야 한다더니, 한 시간 참 길더라." 한껏 상기되어 있는 내게 이반이 한마디 했다. 위험한 애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경계심이 앞서, 딱 한 시간만 있다 돌아가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던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호숫가를 따라 걸어가는 길, 여전히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처얼썩 처얼썩 파도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그날의 파도, 춤추던 별들, 타오르던 불꽃, 울려 퍼지던 기타 소리. 이젠 그 모든 것이 내가 티티카카 호수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들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줘서 고맙다고, 더 이상 네가 아쉽지 않다고, 그 멋진 바다를 향해 마음으로 몇 번이나 인사를 했다. 

밤이 한참 깊었다. 적막도 어둠도 무섭지가 않다. 그럼 우리는 이제 쿠스코에서 다시 만나자. 떠나면서 '다시 보자'는 인사로 헤어질 수 있다니, 그 사실이 그저 행복할 뿐이다.






*왜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은 늘 사진으로 남길 수 없는 걸까. 분위기에 너무 취했나, 아니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나, 그날의 추억은 어떤 사진으로도 남아있지 않다. 대신 이반이 불러줬던 몇 곡의 노래가 남았으니 지금도 종종 듣게 되곤 한다. 

아래의 노래는 'La vuelta al mundo(세계일주)'라는 제목의 노래로 calle13(까예뜨레쎄)라는 남미를 넘어서 아마 스페인어권에서 전반적으로 유명한 푸에르토 리코 출신의 래퍼 듀오의 곡이다. 이반이 통기타를 치며 이 노래를 어쿠스틱하게 만들어 부를 때 모든 아이들이 흥얼흥얼 따라 부르던 게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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