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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Sep 12. 2018

35. 돌아왔다, 다시 쿠스코에

2017.6.21. 쿠스코, 페루(D +135)

티티카카를 돌아 국경을 넘어 페루로 돌아왔다. 푸노에서 반나절 머물면서 아쉬웠던 세비체도 맘껏 먹고 못 들렸던 콘도르 전망대도 다녀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다시 야간 버스. 새벽녘 아스라이 잠에서 깼는데 눈 앞에 노란색 불빛이 하늘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왔다. 왔구나. 이제 도착했구나. 아름다운 나의 도시, 쿠스코에.




당연하겠지만 신기할 정도로 쿠스코엔 익숙한 것 투성이었다. 터미널 앞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파차쿠텍 동상, 온갖 과일과 먹을 것이 즐비한 완착 시장, 늘 여행자로 붐비는 엘솔 거리, 쇼핑의 천국 산페드로 시장, 햇빛에도 불빛에도 아름다운 아르마스 광장, 그리고 보고 싶던 사람들.

M과 나는 앞서 쿠스코를 떠나오기 전 장기 체류했던 호스텔로 다시 돌아갔다. 그 사이에 사장이 바뀌었지만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고 M과의 인연 등으로 인해 운이 좋게도, 잠시 그곳에서 일을 하며 머물 수 있었다. 오랜만에 그리운 손맛이 가득한 한식에 한인 호스텔 특성상 사방에서 들려오는 한국말에, 어쩌면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서 쿠스코가 더 익숙하다고 느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의 과외선생님이자 친구인 그녀가 쿠스코에 아직 있었다. 볼리비아의 유명한 초콜릿 브랜드라는 파라띠(Para ti)에서 산 초콜릿 바구니를 선물로 건네주고 밤이 깊어가도록 술집에서 같이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마치 잠시의 여행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


인티라이미를 앞두고 새 단장을 마친 아르마스광장의 파차쿠텍 동상.


우리가 이곳까지 돌아온 목적이었던 인티라이미(INTI RAYMI, 태양제)를 앞두고 쿠스코는 엄청 북적였고, 연일 축제의 분위기였다. 산 페드로 시장 뒤쪽으로 이어지는 께라 거리에서 산 프란시스코 광장으로 향하는 길이 막혀 이리저리 샛길을 찾아 골목골목으로 다니기도 했다. 신기한 것은, 어디에서 어느 골목을 들어가도 발은 한 번의 머뭇거림도 없이 목적지를 찾아냈다. 이 정도면 동네 주민 다됐네 싶을 정도였다.

처음 가보는 곳도 갔다. 호스텔에서 일하는 덕분이었는데, 쿠스코에서 가장 크고 세련된 복합 쇼핑몰이라는 레알 플라자(Real Plaza). 이케아 같기도 하고, 백화점 같기도 하고, 이마트 같기도 한 이곳은 정말 크고 현대적인 곳이었다. 쇼핑하는 동안엔 볼 것도 많고 시원하고 먹을 것도 많다고 좋아해 놓곤 정작 쿠스코와 안 어울리는 곳이란 생각을 했다. 쿠스코 사람들이라고 늘 몇 백 년 된 오래된 벽돌 건물에서 불편하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닌데. 만약 나도 이곳에서 살게 된다면 이 쇼핑몰에 제일 많이 올 한 사람이었을 거면서 말이다.


거리마다 사람이 넘치던 인티라이미 쯔음의 쿠스코 그리고 나.
밤이면 노란빛이 내려오던 쿠스코의 모습.


가끔 숙소에 넘치는 손님으로 잠자리가 불편했고, 호스텔의 매니저인지 가이드인지 조금은 아리송한 일들을 해내고, 다시 또 한식 열풍이 불었지만, 그저 그 모든 것이 좋았다. 다시 걷는 그 돌길, 익숙한 발걸음과 풍경. 그리고 어느샌가 이 도시 어느 곳을 뛰어다녀도 헥헥거리지 않을 정도로 고산에 적응해버린 나라니.

아마도 일을 했기 때문이었겠지만, 그렇게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쿠스코는 첫 번째 쿠스코와 다르다는 것이 또 너무 좋았다. 시장에 가서 원하는 채소를 찾아서 골라 사고, 이제 막 쿠스코에 도착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쇼핑을 나가 대충 스페인어로 흥정을 대신해줄 수도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적어도 내가 만난 모든 여행자들은 그랬다. 쿠스코는 참 좋은 곳이라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오래 있고 싶은 곳이라고. 그냥, 그곳을 가고 싶어 시작한 여행이었기에 그랬다는 말로는 부족할 것 같다. 그러나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계속 그곳이 참 좋다. 여행이 끝난 뒤에도 한참 쿠스코가 꿈에 나왔다. 그래서 노래도 만들었다. 이렇게 조금씩이나마 글도 쓰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 그곳의 사진을 보며 알 수 없는 추억에 빠지곤 한다.

TV에는 또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그런데 그 전엔 늘 동경만 해왔던 그 도시의 모습이 이젠 내게 익숙한 추억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쿠스코의 어떤 장소든 보게 될 때마다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겠다. 거기서 내가 무얼 했는지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상투적인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여행은 정말 신기한 아니 신비한 행위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지언정 때로는 장소를 바꿔 다른 곳에 있었다는 그 자체가 새로운 에너지가 되고 새로운 떨림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돌아온 현실에서 떠올릴 수 있는 저기 어디가 있다는 사실 또한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이 글을 쓰는 나는 지금도 쿠스코가 그립다. 생각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따스해지는 기분으로 은은하게 그립다. 내가 기어코 그곳을 다녀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 그러니까 오랜만에 계몽적으로 마무리하자면, 가고 싶었다면 가기를. 떠나고 싶다면 떠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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