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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Sep 05. 2018

33. 코파카바나, 결국 다시 만난 인연

2017.6.18 코파카바나, 볼리비아(D +132)

볼리비아의 코파카바나(copacabana). 아마 평생을 이곳에 다시 오지 못하리라, 내 생애 딱 한 번이리라, 뒤늦은 후회로 눈물을 흘리며 떠나왔던 곳. 다시는 없는 인연일 줄 알았던 이 곳에 그러나 남미를 한 바퀴 돌아 약 두 달 만에 다시 돌아왔다. 더 이상의 후회는 없을 거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기로 했다. 내가 바다라 불렀던 티티카카 호수는 변함없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따리하에서 수크레, 라파즈를 거쳐 순식간에 다시 국경 마을인 코파카바나까지 왔다. 이제 이 곳에서 티티카카 호수를 따라 국경을 넘으면 다시 페루다. 남미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출발점인 페루까지 향하게 한 이유였던 쿠스코의 축제 ‘인티라이미(INTI RAYMI)’는 이제 열흘도 남지 않았다.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그렇다고 어렵게 돌아서 기어코 다시 온 코파카바나마저 바쁘게 보낼 순 없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나니 해가 조금씩 낮아지는 시간이었지만 밖으로 나왔다. 그리 번화한 동네가 아니라 혼자 멀리까지 갈 생각은 없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나는 벌써 미라도르(mirador, 전망대)에 오르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흙 길에 조금 긴장했지만 막상 올라간 그곳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코파카바나를 거쳐간 모두가 사진을 남기고 간다는 그 포인트에서 한참 셔터를 누르고, 오랜만에 셀피도 정말 많이 찍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싶었다.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눈앞의 풍경이 시시 각각으로 아름다웠다.


미라도르(전망대)에 오르는 길.
코파카바나에 온 모두가 이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인증샷을 남긴다.
전망대에서 일몰을 기다리는 사람들.


다음날은 아침 일찍부터 배를 타고 태양의 섬에 들어갔다. 배의 행선지는 두 곳, 달의 섬(이슬라 데 라 루나, isla de la luna)과 태양의 섬(이슬라 델 솔, isla del sol). 태양의 섬은 말 그대로 태양, 잉카의 신인 '인티(Inti, 태양신)'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앞서 이곳을 지나갔던 친구가 달의 섬은 볼 것 없으니 건너뛰어도 된다 했는데 가능한 모든 것을 다 하기로 한 나는 두 군데를 모두 경유하는 표를 샀다. 

배는 거진 한 시간을 달렸다. 안전장치 하나 없이 불안하게 기우뚱거리는 배 천장에 설치된 의자에 앉으니 사방은 온통 파란 물결, 수평선 너머로는 아스라이 설산이 펼쳐져 있다. 지금도 난 의식하고서도 혹은 의식하지 않고서도 이 호수를 바다라 부르곤 하는데, 그 넘실대는 파란 물결을 떠올리면 여전히 나의 이런 분류가 참 마음에 든다. 그것도 이 높은 땅이 품은 전설의 바다라고 생각을 더하면 이곳이 더 신비롭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달의 섬엔 딱 하나, 스러져가는 오래된 신전이 형태도 온전히 갖추지 못한 채 덩그러니 놓여 있다. 누군가는 볼 것도 없다고 했던 황량한 곳이지만 왜인지 참 마음에 든다. 특히 섬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 오래된 건물의 터와 함께 바다 너머로 펼쳐진 설산을 한눈에 담으니 그 장면이 꽤 마음에 들었다. 마침 신전 터 안쪽의 막혀있는 창가엔 알지 못할 인물이 담겨 있는 흑백사진이 와인 한 병과 함께 남겨져 있었다. 아마도 비밀스러운, 해피엔딩은 아니었을 것 같은 어떤 이야기를 숨겨놓기 좋은 장소라고 생각한 것은 나뿐이 아니었나 보다.


달의 섬 위쪽에서 폐허같은 유적지를 내려다보며. 저 멀리 눈 덮힌 설산이 보인다.
신전 안쪽의 흔적. 사연이 궁금해진다.


태양의 섬은 이 바다의 섬들 중 페루의 인공섬 우로스 만큼이나 유명하고, 또 잉카의 역사적인 의미까지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만큼 찾는 사람도 많고 항구도 크고 아름다운 곳이지만, 왠지 그만큼 사람의 손을 더 많이 거쳐간 느낌이 오히려 이곳을 평범하게 보이게 만드는 듯했다. 이곳에서 보는 밤 풍경이 그렇게 아름다워 숙박을 하고 나가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는데 실은 올해 초 한국인 여성이 볼리비아 티티카카 호수 인근에서 변을 당했다는 안타까운 그 일이 벌어진 곳이 바로 이 섬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당시에 위험했고 무모했고 운이 좋았다. 이곳에 도착해서 역시 더 많은 곳을 보겠다는 욕심에 혼자서 발걸음을 빨리 옮겼다. 지도 상으로 보면 섬 꼭대기로 추정되는 미라도르와 그 옆의 작은 항구 쪽으로 나있는 유적지의 표시가 무척 가까워 보였다. 그러니까 등고선을 빼고 생각한다면 가깝긴 했다.
어느새 주변에서 삼삼오오 다니던 무리들이 사라지고 항구도 시야에 잡히지 않았다. 살짝 겁이 나서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아직 날이 밝은데, 게다가 이곳은 신성한 곳인데, 관광지인데, 라는 생각을 하며 미라도르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생각만큼 아름다웠고 뿌듯했다. 아무도 없는 섬의 정상에서 또다시 한참 사진을 찍고 바람을 맞고 바다를 바라봤다.
돌아내려 가는 길. 올라올 때와 다른 방향의, 항구 및 유적지와 가까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알고 보니 그곳은 길이 아닌 곳이었다. 쭉 아래로만 내려가면 정말 금방인 것 같은데 길은 아래로가 아닌 옆으로만 나있었다. 무성하게 자란 풀들 사이로 야마만 가끔 보일 뿐, 아무 인적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이렇게 타지에서 조난되어 쓸쓸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미끄러지고 겅중겅중 뛰어내리며 살겠다고 열심히 아래쪽을 향해 내려갔고, 그러다가 정말 지쳐버렸을 때, 같은 배를 타고 이 섬에 들어왔던 일행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태양의 섬 미라도르(전망대)를 향해 오르는 길. 
태양의 섬 꼭대기에 놓여져 있던 제단 같은 것.


"뭐가 그렇게 바빠? 여기 앉아서 좀 쉬어."
콜롬비아에서 온 알레한드라와 안드레아. 그리고 마찬가지로 콜롬비아 출신인 루이스, 아르헨티노 이반. 바다를 바라보며 과일을 나눠 먹고 있던 이들은 같은 배를 타고 있던 나를 알아봤다. 얼굴이 익은 사람을 만난다는 게 이렇게 반가운 일일 줄이야. 
이후에도 조금의 곡절은 있었지만 이 아이들과 함께 나는 계획했던 작은 유적지도 들려 뭍으로 잘 돌아올 수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친절했고, 알고 보니 그 안에서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고, 우리는 얼토당토않는 스팽글리쉬(스패니쉬+잉글리시)로 서로의 음식에 대한 이야기, 이후의 일정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눴다. 내가 말은 못 하면서도 대충 다 알아듣긴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모두들 놀라워했다.
기다렸고 그리워했던 그 마음을 티티카카가 헤아려 준 걸까. 마지막까지 즐겁게 모든 일정을 마칠 수 있던 건. 게다가 아마도 길을 잃지 않았더라면 만날 일도, 만났다 해도 이야기 나눌 일 없었을 사람들까지 알게 됐으니 말이다. 이들 중 일부는 이후에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나의 남미 여행이 끝날 때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인연이 되었다. 
 

태양의 섬을 떠나는 마지막 배를 기다리다 만나게 된 섬의 주민들.


실은 알고 있다. 이곳도 그저 하나의 여행지 중 하나라는 것. 이렇게, 언제든 마음먹으면 다시 올 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때론 거리가, 돈이, 시간이, 그런 물리적인 요소들이 모든 걸 불가능하게 만든다. 아니 어쩌면 그 모든 제약은 내 마음이라는 심리적 요소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2달 전 코파카바나를 떠나올 때 더 슬펐던 것은, 채 준비 없이 맞이한 나의 짧은 판단으로 이 아름다운 곳을 스쳐 보내면서 비슷한 방식으로 떠나보냈던 나의 다른 인연들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분명 그들의 대다수는 이제 와서 내가 원한다 하더라도 다시는 그때와 같은 인연으로 이어질 수 없겠지. 그래서 우리는 늘 아쉬워하고 슬퍼하고 후회한다. 하지만 인연이라는 건 또 참 이상해서, 지금처럼,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다시 또 내 앞에 나타날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알았다면 이렇게, 다 해야지. 아끼지 말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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