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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Jun 06. 2018

05. 마추픽추, 전설을 향한다기엔 평범한

2017.3.17. 마추픽추, 페루(D +39)

해발 2,430m, 우르밤바 계곡 연안 산자락에 위치한 잉카 시대의 도시로 '공중 도시',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 등으로 불리는 곳. 스러진 잉카제국과 함께 산 꼭대기에 비밀스레 묻히고 만 마추픽추는 1911년에야 다시 발견되었고, 그제야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받았다. 각종 신전과 광장, 주거지, 경작지, 수로 등이 산 꼭대기에 돌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아직까지도 그 건축법이라든가 용도 같은 것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의 도시. 산 아래에선 그 모습이 전혀 드러나지 않기에 더욱 신비로운 공중 도시, 그 덕분에 당대의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잉카를 대표하는 유적지이기도 하다.




경주하면 석굴암 하듯, 쿠스코 하면 마추픽추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오길래, 마추픽추가 쿠스코에 있는 유적인 줄 알았다. 쿠스코에 왔으니 마추픽추도 이제 다 왔다고, 맘만 먹으면 며칠이고 몇번이고 가서 입장료만 내면 볼 수 있는 덴 줄 알았다. 뭐 맞다면 맞지만, 아니라면 아니었다. 버스로 꼬불 꼬불 산길을 5시간, 또다시 기찻길을 따라 3시간을 걸어야 겨우 마추픽추 아래에 있는 또 다른 마을인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에 도착한다니 말이다.

물론 가는 길은 다양하다. 걷는 대신 계속 버스나 기차를 타는 방법도 있다. 더 빠른 대신 더 비싸다. 혹은 여행사를 통하면 옛 잉카인이 마추픽추를 향하던 그 길을 따라 2박 혹은 3박에 걸쳐 천천히 자연을 느끼며 갈 수도 있다고 했다. 어쨌든 마추픽추는 쿠스코에서 산 넘고 물 건너 다른 도시까지 넘어가야 다다를 수 있는 곳이었다.

쿠스코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과 별개로 서운한 건 또 있었다. 그렇게 가고 싶어 한 마추픽추였는데, 그걸 보겠다고 그나마 현실에서 쌓아놓은 모든 것을 버리고 이렇게 뛰어나왔는데, 정작 와보니 페루의 어떤 여행사에서든 예약만 하면 바로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었다. 마추픽추는 정말 현실에 있는 곳이었나 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나 보다. 택시나 지하철로 도착하는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돈을 내고, 버스나 기차를 선택하면 언제든 갈 수 있는.

 

2박 3일짜리 잉카트레킹을 택한 H를 제외한 나머지, 그리고 이곳에서 만난 또 다른 친구들과 함께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에서 1박을 하고 새벽부터 올라가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정문 앞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하다. 예쁘고 아기자기하고 물가도 비싼 상업도시 아구아스 깔리엔떼스, 12달러만 내면 고생할 것 없이 우리를 마추픽추의 정문까지 데려다주는 대형 셔틀버스, 여느 관광지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혼잡 속에서 길게 줄을 서야 하는 매표소와 정문. 그렇게 꿈에 그리던 마추픽추에 도착했다. 좀 더 신비롭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바라 왔던 내 기대는 다 걷히고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여전히 현실 속에 발을 딛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전설의 공중 도시는 온통 구름과 안개에 둘러 싸여 있었다.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망지기의 집’ 근처를 서성이며 1시간이 넘도록 기다리고 있을 때, 마치 무대의 막이 열리듯 구름과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마치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그 도시의 모습은 이미 사진으로, 영상으로 수십 번을 봐왔던 그 모습 그대로인데, 왜 그렇게 온몸이 떨려오던지.



몇 백 년의 시간을 숨죽인 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한 도시의 흔적. 아니, 도시는 한 번도 숨죽인 적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인간들이 만들었고, 잊었었고, 다시 찾아냈고, 신비롭다고 경이롭다고 가져다 붙였겠지. 그 옛날 잉카인들이 걷고 뛰고 먹고 자고 했을 그 공간에 이제는 세계 각국의 관광객이 가득 들어찼다. 제 기능을 상실한 건물 사이를, 계단식 경작지 사이를, 그 수많은 세월과 자연의 변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버텨온 돌들 사이를 하염없이 걸었다. 너무나도 그대로 남아있는 건물들 사이를 걷다 보면 당장이라도 잉카인이 나타나 인사를 한다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여기는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하는 곳.  


결국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 다시 돌아왔다. 한 바퀴를 다시 돌고, 한참을 앉아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바라보아도 사라지지 않는 눈 앞의 풍경, 앞으로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지금처럼 몇 백 년을 더 견고할 그 풍경을 보면서 이건 여전히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했어, 떠나오길 정말 잘했어. 기어코 이곳에 오고야 말았구나. 바로 오늘만큼은,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도 바라 왔던 전설의 마추픽추가 평범한 나의 하루의 일부가 되었다.



* 마추픽추 입장권
내가 마추픽추에 올랐을 때, 그러니까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마추픽추 입장권은 마추픽추와 바로 옆에 우뚝 솟은 와이나픽추(사진 속 마추픽추 도시 유적의 뒤로 보이는 산) 입장권 정도로만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관람시간까지 세분화되어 오전, 오후로 표가 나뉘었고(오전 : 6AM~12AM / 오후 : 12PM~5PM, 그러니까 오전 표를 산 사람은 12시 전에 무조건 나와야 한다는 말) 인터넷으로도 예매 가능하다고. 온라인 예매 사이트는 http://www.machupicchu.gob.pe/  이러한데, 예약할 때 시간도 많이 걸리고 간혹 정보가 잘못 기입되어 나오기도 하나보다.
참고로, 여행사를 통해 표를 구매했던 난 입장권에 나의 주민등록번호, 심지어 성별까지 잘못 기입되었는데 문제없이 통과했다. 표만 있으면 그리 꼼꼼하게 보지 않는 걸까. 아 역시 마추픽추는 정말, 그저 그곳에 있다면, 갈 의지가 있다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관광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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