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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Jun 08. 2018

06. 우리는 여전히 같은 길 위에

2017. 3. 19. 쿠스코, 페루(D+ 41)

다른 도시로 향하는 버스를 놓칠 뻔하고,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을 상대로 실랑이를 벌이고, 평생에 다시없을 것 같은 고된 트레킹을 해내고. 경찰서 소동, 새벽의 사막, 꿈에 그리던 마추픽추 등정까지. 아는 사람도, 연고도 없는 다른 대륙에서 이런 여정을 해나가면서 같이 이야기하고 의지할 수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힘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예정된 일정에 따라 이제는 쿠스코를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  




일행의 든든한 리더였던 H, 늘 긍정적인 마인드로 주변까지 즐겁게 만든 애교쟁이 J, 청일점 막내로 묵묵히 고된 일을 맡아 해결해준 S, 와라즈에서 처음 만나 조금씩 어긋나는 일정에 매번 헤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했던 L. 우리는 약 2주 정도 서로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서로의 가장 든든한 존재였다.


한국에서 여행을 준비할 때부터 목적지였던 쿠스코에 오면 정말 아쉽지 않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와야겠다고 했던 나는 막상 떠나야하는 동행들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이렇게 보내고 나면 또 이런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까,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을까, 외롭지는 않을까, 마지막까지 이 아이들을 따라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온 쿠스코인데, 마치 지방으로 출장을 왔다가 차 시간에 맞추어 서울로 돌아가듯이, 이렇게 볼일을 마치자마자 휩쓸리듯이 빠져나가는 것은 싫었다. 지금 떠나면 언제 또 이 땅을 밟아볼 수 있겠어.  


고민 끝에 친구들을 보내고 조금 더 혼자 남기로 했다. 쿠스코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2주 이상 장기 투숙을 할만한 한인 숙소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국말을 할 줄 아는 페루 대학생을 소개받아 스페인어 과외를 받기로 했다.

아무 계획도 목적도 할 일도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정말 오랜만, 아니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았다. 스페인어 과외를 받기로 한 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의 나를 견디기 어려울까봐 였을지도 모른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내가 여기에 더 머물러도 된다는 이유를 만들어놓고 싶었다. 이제까지의 나는 늘 그런 세상 속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남아있어도 될까 불안한 마음 너머로 어쩌면 처음 맞이하는 자유의 기분 같은 것이 느껴졌다.  

H는 호스텔을 옮기는 나의 이사 길을 함께 해주었고, J는 나의 과외 선생님과 함께 만났던 날 "좋은 친구 만났네, 이제 언니 혼자 두고 가도 안심이 되겠어"라며 웃었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의 남미 여행자들이 모여 있는 카카오톡 단체방에 나를 초대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다 건너 이 대륙에 모인 수백 명의 여행자들이 그곳에서 어느 도시의 좋은 호스텔, 여행책에는 나오지 않는 맛집, 도난을 당하거나 현지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에 대한 대처법 등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일행이 있었고, 누군가는 혼자였지만 그 안에서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간혹 혼자 다니던 여행자들이 그 단체 채팅방을 통해 새로운 동행이 되기도 했다. '남미'라는 공통점 하나로만 엮일 수 있었던, 참 신기하다면 신기할 수 있는 인연들. 남미 단체방과 별개로 우리는 종종 따로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특히 속도가 한참 느려진 내 여행길에서 먼저 지나간 이 친구들로부터 많은 정보, 그리고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각자의 여행이 소중하고 즐겁기를, 그리고 나는 여기서 또 다른 새로운 시간들을 만들어 가기를 바라며 안녕을 고했다. 먼저 S와 L이 떠났다. 그리고 며칠 지나 H와 J도 쿠스코에서 만난 다른 동행들과 함께 다음 목적지로 떠났다. 이제 내겐 밤이면 야경이 볼만하고 아침이면 눈부실 정도로 햇볕이 떨어지는 큰 창 옆 침대 자리가 남았다. 오랜만에 혼자가 되었지만 외롭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길 위에 있었으니까.

총 20박 21일을 머무른 한인 호스텔. 마침 배정된 침대는 커다란 창이 달린 벽 쪽이었다. 밤이면 반짝이는 불빛들을, 아침이면 내리쬐는 햇살을 누워서 맞이했던 행운의 자리.
쿠스코 스타벅스에서 내려다보는 아르마스 광장의 풍경. 'mi vista favorita es este paisaje(이 풍경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모습이야)' 라는 말을 배운 날.
비 오는 저녁, 아르마스 광장의 풍경.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2층 카페 창가에 앉아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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