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6.30. 팅고마리아, 페루(D + 144)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거의 고립되어 있던 곳, '아마조니아의 문'이라는 별칭을 가진 곳, 지금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팅고 마리아(Tingo maria). 아마존의 가장자리에서 밀림으로 이어지는 이 곳은 오랫동안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채 산속에 고립되어 있었기에 순수한 자연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 순수한 자연을 경험해보고 싶어 갔던 것이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자연보다는 함께 갔던 학생들과의 여정이 더 생생하다. 그러고 보니 대학교 답사는 거의 10년 만이다. 무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대학생들을 쫓아서 말이다.
미겔의 학교 사람들과 합류한 그 직후의 일이다. 열대기후로 넘어오는 통에 온 몸이 땀에 젖어 씻어야 할 것 같았다. 미겔이 같이 씻자며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차라리 이놈이 흑심을 품고 음침한 곳으로 향했다면 소리라도 지르며 도망쳐 나왔을 텐데. 그가 데려간 곳은 사방이 탁 트인 곳이었다. 트여도 너무 트인 곳. 그곳은 강가였다.
남학생이며 여학생, 아까 인사를 나눈 교수님까지 바지를 걷어올리고 강에 들어가 몸을 씻고 있었다. 옷을 입은 채로 온 몸을 다 담가버리거나, 그러지 않더라도 티가 안 나게 잘 가려가며 구석구석 씻는 것 같았다. 빨래를 같이 하는 사람도 있었다. 강물은 흙빛이었고, 개중에는 비누나 샴푸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 인근에 다른 샤워시설이 없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없었지만 온몸이 끈적끈적, 도저히 안 씻고 버틸 수는 없었다. 팔 다리, 목 정도에 겨우 물을 축이고 몸을 숙여 머리까지 감고 나왔다. 저 흙빛 강에서 온 몸을 깨끗이 씻은 이 사람들과 차마 몸을 다 담그지 못하고 보이는 곳만 씻고 나온 나. 과연 누가 더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판단할 수가 없다. 그러나 텐트 치고 들어가야 한다는 밀림을 향하면서 어떻게 씻을지 생각조차 못해봤다니, 이건 완벽한 나의 패배다.
이튿날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우리가 가려는 곳은 버스를 타고 더 깊이 들어가야 했다. 버스는 두 대가 있었는데, 비교를 하자면 한 대는 비교적 깨끗하니 우리나라의 고속버스 같은 느낌, 또 하나는 남미에서 가끔 타던 덜덜거리는 로컬버스 같은 느낌이었다. 심지어 로컬버스는 갑자기 구덩이에 빠져 올라오지 못하는 바람에 모든 남학생들이 뒤에 달라붙어 밀어야 했다.
아마 이곳에 떠나올 때 어떤 버스를 탈지 골라서 학생들로부터 돈도 다르게 걷은 모양이다. 이곳에선 사람들이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움츠러들지 않는다고, 그러니 좀 더 자유롭고 열려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한 적 있었는데. 어쩌면 티 나는 격차가 더 큰 곳이기에 가난이 더 잘 보이는 곳인 건 아니었을까. 미겔은 말하자면 늘 뽀브레 페루아노. 내 자리를 어떻게 마련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를 따라 로컬버스에 몸을 실었다.
곧 사람 키의 열 배는 훌쩍 넘는 듯한 나무들이 우거진 숲이 나타났다. 고대 원시 밀림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우리는 이제 진짜로 거인국을 탐험하는 소인들 같아졌다. 그러나 모두들 이런 장면이 낯설지 않은 건지 학생들은 눈 앞의 거대한 풍경보다 나의 존재를 더 신기해하는 것 같다. 생각보다 한국에 대해 많이 알고 있어 놀랐는데 역시나 K-POP과 드라마의 힘이 큰 모양이다. 누군가 한국에 그렇게 잘생긴 남자들이 많은데 어쩌자고 저런 페루아노를 쫓아 여기까지 왔냐고 진심으로 놀라서 묻기도 했다. 연예와 연애, 역시 지구 반대편에서도 그 또래 친구들의 관심사는 비슷하다.
트레킹을 싫어 하지만 그래도 산을 못 타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본격적으로 산에 오르기 시작하니 정말 쉽지가 않다. 두 번이나 제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사실 어디가 길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수풀을 헤치며 앞사람만 따라갈 뿐. 가까이에 물이라도 있는 건지 언제부턴가 이끼도 많고 흙은 다 젖어 있었는데, 30~40분 정도 산을 타다 보니 거대한 폭포가 나타났다. 오토롱고 폭포(Catarata de Otorongo), 오늘의 목적지다.
그날은 그 폭포 주변의 숲의 생태를 직접 살펴보는 날이었다. (아마도) 기후와 토양, 환경 등에 따른 식생 등에 대한 교수님의 설명이 한참 이어졌다.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정말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가득하다. 나비나 이름 모를 곤충들도 많은데 죄다 평소 보던 것들에 2배는 더 큰 것 같다. 교수님의 이야기를 나도 다 알아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냥 아쉽기만 한데, 그 와중에도 설명 안 듣고 딴짓하는 학생들은 꼭 있다. 한 학생은 곤충을 보고 신기해하고 놀라는 나를 보더니 어디선가 자꾸 그런 것을 가져와서 보여주며 나는 알아듣지도 못할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산에서 먹은 점심은 넓적한 이파리에 싼 밥이었다. 앉아 쉴 수 있는 나무 의자는커녕 돗자리 같은 것도 없어 대충 흙바닥이나 비어져 나온 나무 뿌리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심지어 수저도 나눠주지 않아서 전날 받은 것을 씻어서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손으로 먹을 뻔했다. 이들은 산에 올 때 이렇게 쓰레기로 버려질 수 있는 것들을 최소화한다고 한다. 밥을 다 먹은 잎은 그대로 땅에 버려도 금방 썩어서 분해되거나 양분이 될터였다.
그 길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는지 돌아오는 길엔 어디선가 나타난 아줌마 아저씨들이 자꾸 학생들을 불러 세워 먹을걸 줬다. 만화에서만 봤던 것 같은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바나나 같은 것들 말이다. 이 동네 사람들인 모양인데, 그렇게 주는 과일들이 꼭 나무에서 갓 따온 모양새다. 알고 보니 길 양쪽을 뒤덮고 있던 나무들에 온통 바나나와 카카오 같은 열매들이 매달려 있었다.
처음으로 카카오 열매를 봤다. 앞서 가던 누군가가 열매를 반으로 쪼개서 나눠줬는데, 씨가 커다란 하얀색 과육은 초콜릿 맛은 전혀 느낄 수 없지만 꽤나 달았다. 실제로 초콜릿은 과육이 아닌 씨를 말리고 으깨서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답사는 다음날까지도 계속됐다. 우리는 식물원을 갔고 동물원도 갔다. 식물원은 또 다른 밀림에 들어온 듯 멋있었지만, 동물원은 좁고 깨끗하지도 않은 시설에 동물을 가둬둔 것이 방치되어 있는 것 같아 평소라면 보기 힘들 투칸이나 구아띠 등 낯선 동물들이 많을 텐데도 잘 둘러보지 못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팅고마리아 지역은 주요 카카오 산지로 남미 최초의 공정무역 초콜릿을 생산하는 곳이란다. 그래서 그 생산자 조합이 우리나라 아름다운 가게 등과 관계를 가지고 왕래도 있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이 국립공원을 돌아볼 수 있는 투어도 맘만 먹으면 찾아서 더 편하게 에메랄드 빛 강과 동굴 등의 다양한 곳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혼자서도 맘먹고 미리 준비했다면 더 알차고 좋은 여행을 할 수 있었다는 거다.
미겔을 따라 나섰던건 기왕에 기회가 왔을 때 좀 더 편하게 가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고, 현지인을 따라간다니 남들은 하지 못하는 경험을 하고 싶은 욕심이 반이었다. 생각만큼 이 경험은 정말 특별한 것이었지만, 스스로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해서였는지 그만큼 깊이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고 실은 조금 힘들기도 했다. 결국 강물에 훅 들어가서 온 몸을 시원하게 씻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신기한 건 이제 나는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학생들은 아직도 가끔씩 미겔에게 내 안부를 묻는다고 한다. (설마 진짜 여자친구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겠지?) 아 물론 미겔과 더 깊은 관계가 된 것도 맞다. 그냥 스쳐 지나갈 뻔한 인연에서, 이제는 서로 자라온 시간, 가족, 생활 등의 이야기를 알게 된 진짜 친구로 발전했달까. 미겔은 지금도 가끔씩 와누꼬의 풍경이나, 그가 동네의 도서관 등에서 봉사하는 모습 등이 담긴 사진을 보내오곤 한다. 언젠가 다시 그곳을 간다면 그때는 조금 더 푸욱- 그들의 삶에 빠져들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