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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Jun 13. 2018

08. 초콜릿을 파는 가난한 한국 여자애

2017.4.3. 쿠스코, 페루(D + 56)

쿠스코에 머무는 동안 딱히 할 일이 없을땐 주로 아르마스 광장 벤치에 앉아있는게 일이었다. 햇빛이 잘들기도 하고, 광장을 둘러싼 오래된 듯한 풍경이 좋고,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게임 속 돌발 퀘스트처럼 뜻밖의 이벤트가 열리기도 했다.




"초콜릿 살래? 1솔이야."

아르마스 광장 벤치. 이번엔 옆자리에 앉더니 굳이 온 혓바닥을 다 꺼내보이며 아이스크림을 빨면서 헌팅을 시도하는, 리마에서 왔다는 희여멀건한 페루 청년을 어떻게 떼어놓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불쑥 끼어든 길거리 상인(?). 한 손에 들고 있는 초콜릿은 누가 봐도 슈퍼에서도 파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이세스?"

"어, 너 꼬레아나? 아직 여기 있었구나!"

얼마 전 미겔과 함께 팔찌를 팔던 모이세스였다. 여기에서 이렇게 우연히 아는 얼굴을 보다니. 그것도 외국인을. 미겔의 말로는 이 녀석도 쿠스코를 곧 떠난다고 했었는데, 왜 아직 여기 있는지, 혼자서 뭐하는지, 이제 아주 조~금 더 향상된 스페인어로 좀더 수다도 떨어보고 싶었다. 남미에 왔으니 남미 남자친구를 사귀어볼 마음은 없느냐는 그 느끼남을 향해 "여기 내 친구가 왔네”라고 말한 뒤 모이세스에게 외쳤다. "바모스!”



바모스(Vamos)는 '가자'라는 말이라고 배웠는데, 이럴 땐 같이 초콜릿을 팔자는 말로도 해석이 되나 보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모이세스와 함께 광장을 돌며 아까의 나처럼 광장에 놀러 온 이들에게 초콜릿을 팔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모이세스가 한참을 무어라 말하면 사람들이 나를 바라봤다. 말을 잘 못하는 나는 조용히 웃거나, 분위기를 봐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un sol. por favor.(1솔이야. 하나 사줘.)"

과연 이렇게도 초콜릿이 팔리는가 싶었는데 놀라울 정도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초콜릿을 샀다. 아르마스 광장에 놀러 온 듯한 친구들 무리, 수줍어하는 커플, 우리처럼 여행자 같아 보이는 검은 눈동자의 아이들. 유럽이나 영미권으로 보이는 사람들보단 주로 현지인 느낌을 풍기는 사람들이 초콜릿을 사줬다. 간혹 나와 눈이 마주치면 배시시 웃으며 너 한국에서 왔어? 라며 관심을 보이고, 다정한 인사나 악수를 덧붙여 주기도 했다.

모이세스는 정말 수완이 좋은 아이구나 싶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이 아이는 또 나를 팔고 있었다. pobre coreana(뽀브레 꼬레아나, ‘불쌍한/가난한 한국여자’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귀에 확 들어왔다.  


"나는 가난한 볼리비아노, 얘는 불쌍한 꼬레아나야. 나는 이제 볼리비아로 돌아가야 하고, 이 아인 더 넓은 남미를 여행하며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싶다는데 안타깝게도 우린 돈이 없어. 이 불쌍한 친구를 좀 도와주지 않을래? 이 초콜릿을 단 돈 1솔에 사주는 것으로 말야."


이후 가끔씩 의아해하며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norte(북쪽, 즉 북한을 말한다)"라고 덧붙여주기도 했다는 건... 비밀. (사실 모이세스는 자기 국적도 판 것이었다. 그는 볼리비아와 가까운 페루의 국경마을 푸노에서 왔다고 했는데, 그래서 볼리비아 사투리를 쓸 줄 알았다.)  

초콜릿은 마트에서 한 상자 10솔짜리를 산 것이라 했었는데 그 안에 든 낱개 포장 초콜릿이 30개. 개당 1솔(한화 약 350 ~ 400원)에 팔아 올린 그날의 수익은 16.5솔(한화 약 6천 원 남짓). 괜찮은 수익이었는지 엄청나게 신나 보이는 모이세스는 내게 내일도 나와서 함께 초콜릿을 팔자고 했다. 내일부턴 수익이 나면 반반 나누어 가지자며 말이다.(그렇다, 그날의 수익은 모두 모이세스가 가져갔다. 그리고 심지어 다음날엔 자기가 잡은 약속을 안 지키고 안 나왔다.)  

몇 군데의 슈퍼를 들려 오늘 번 돈으로 개중 가장 저렴한 파스타 면과 소스를 샀다. (합해서 5솔도 안 썼다.) 모이세스를 따라 아우키스 호스텔로 갔다. 생각보다, 아니 생각만큼(10솔이라니!) 허름했고 사람들이 참 많은 곳이었다. 모이세스가 소개해주는 또 다른 친구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파스타는 역시나 그냥 그랬다. 맛도 없고, 꼬질꼬질하고, 북적북적 거리고, 말도 죄다 못 알아듣겠는데 참 이상하지. 그냥 재미있었다. 그 자리에 멀뚱히 앉아있는 내가 좀 신기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별의 별 일을 다 해보긴 했지만 그래도 길거리에서 팔찌를 배우거나 초콜릿을 판 건 처음이다. 아무래도 요즘은 참 별난 날들의 연속이다. 아마 내일도 또 다른 별 날이 펼쳐지겠지. 도대체 매일 매일을 예측할 수가 없다. 목적도 없이 쿠스코에 머물며 기왕 시간을 낭비할 것이라면, 여유를 부린다면, 이만한 사치가 또 어디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던 나날이다.


모이세스와 같이 팔았던 그 초콜렛. 모이세스가 너는 친구니까, 라며 내겐 2개를 그냥 줬다.
남는 테이블이 없어 저녁은 접시를 손에 든 채 그냥 먹었고, 차를 마실때는 빈 의자를 테이블 삼아 남는 컵을 우르르 가져와야 했다. 그런데도 왜 그런지 불편하지가 않았다.



*아우키스 호스텔
내가 아르마스 광장에서 재미있는 녀석들을 만나 그들의 호스텔까지 다녀왔다 말했을 때, 묵고 있던 숙소의 매니저가 눈을 빛내며 그 호스텔의 이름을 물었다. 알고 보니 아우키스는 언젠가 한 여행자를 통해 '내 아름다운 친구들의 숙소' 같은 느낌으로 이미 매체에도 등장한 적이 있더랬다. 조금 더 빨리 이 기사를 읽었다면 그들과 더 친해질 수 있었을까, 그들을 더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건 모르겠지만.
글쓴이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이 사람의 글은 내가 충분히 알지 못했고 표현하지 못한 그곳의 친구들에 대해 더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도 같아서 굳이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2년 전 글이던데, 어쩜 그때나 지금이나 이곳은 차이가 없는지. 장소의 힘이란 대단하다. 사람들은 늘 바뀔텐데도 모두가 거기서 비슷한 경험을 하는 모양이니 말이다.
한겨레 [매거진 esc] 노동효의 중남미 아미스타드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756096.html (2016.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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