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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Jun 15. 2018

09. 김칫국물, 어쩌다 나만의 비밀 소스

2017.4.7. 쿠스코, 페루(D +60)

며칠 전 아르마스 광장. 어김없이 벤치에 앉아 햇빛을 쬐다가 아우키스에서 만났던 아르헨티나 커플 카밀라와 니콜라스, 리마가 고향이라는 에두아르도를 만났다. 어쩌다 보니 그들을 따라나섰고, 하루종일 함께 시간을 보낸 뒤 아우키스로 가서 저녁까지 얻어먹었다. 그리고 한국의 음식이 먹어보고 싶다는 그들의 말에 마침 호스텔에 남아있는 김칫국물을 사용해 김치전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그때쯤 아우키스의 투숙객들은 대부분 나를 알아보고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해주곤 했다. 특히 새롭게 친해진 세 명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카밀라로부터 또 다른 팔찌 만드는 법을 배웠고, 한국에 관심이 많은 니콜라스는 현재(2017.4월 초) 한국에 대통령이 없다는 사실에 흥미로워하며 이것저것을 물어봤다. 판초라는 중닭(!?)을 애완동물로 여행에 데리고 다니는 에두아르도는 예술가라고 했는데,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쓰면 어떤 모양인지 궁금해하길래 세 명의 이름을 하나씩 다 한글로 써주니 좋아하곤 했다. 부족한 마음으로 미겔을 보냈던 아쉬움이 있었기에 이제부터 친해지는 사람들에게라도 더 할 수 있는 걸 다 하고싶었다.

김치전을 하러 아우키스에 간 것은 한 달여의 쿠스코 생활을 마무리하고 떠나기로 한 날의 바로 전 날이다. 묵고 있던 한인 호스텔에서 매니저가 담근 김치가 거의 떨어지고 국물이 남아있었는데, 가져가서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시장에 들러 호박과 당근, 양파, 소시지 등의 재료도 사서 아우키스로 향했다.


웰컴 투 아우키스.

"이게 뭐야? 뭘로 만든 거야?"  

"이건 어떻게 만들어? 왜 안 가르쳐주지? 비밀 소스인 건가!"

냄새가 나거나 국물이 샐까 봐 비닐봉지에 두 겹 세 겹으로 싸온 붉은색 김칫국물에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 이걸 대체 뭐라고 설명해주면 좋을까…. 일단 김치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 도저히 내 능력 밖이다. 주저리주저리 얼버무리는 나를 보며 이것은 필시 한국만의 '비밀 소스'라고 자기들끼리 감탄한다.

생각보다 아우키스의 주방은 작았고 (불이 두 개, 테이블은 제대로 된 건 하나밖에 없었으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숙소에서 점심을 해 먹었다. 여기 저기 치여가며 겨우 재료 손질을 마치고 김치전을 부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여행담(?)처럼, 외국인들만 잔뜩 있는 이런 호스텔에서 홀로 색다른 요리인 한식을 하면 사람들이 관심도 보이고 좋아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다른 그림이다. 그냥 나도 이곳에 있는 다양한 색깔의 여행자 중 하나. 모두 각자의 일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카밀라와 니콜라스는 요리법까지 되뇌며 주의 깊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라서 소시지를 사 왔지만, 원래 여기엔 고기나 해물을 넣어야 더 맛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해물을 스페인어로 뭐라고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행히 모두들 생각보다 맵지 않아했고, 또 정말 맛있어 했다. 전의 가장 큰 단점은 한 번에 많은 양을 요리하지 못하고, 팬에 한 장씩밖에 구워내지 못한다는 것 아닐까. 그렇다고 다 부치고 난 뒤에 한 번에 먹자면 식은 전은 그 맛이 처음만큼 못하니 부치는 대로 일단 먹으라고 잘라줬다. 접시는 자꾸 비워지고, 중간중간 빈 접시를 기다리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뭔가 절반의 성공 같은 기분…. 이건 그들의 식문화와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겠지만 가장 맛있는 상태의 전을 맛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가끔 옆에서 다른 요리를 하거나 식사를 하면서 무슨 음식이냐고 물어오는 애들에게도 맛을 보여줬다. 다들 rico(맛있어)라고 외쳤다.

참, 지난번 이곳에 왔을 때 모이세스를 다시 만났는데, 왜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안 지켰냐는 말에 미겔까지 언급하며 자꾸만 거짓말을 해서 한번 쏘아붙였더니 그 후론 아는 척을 안 한다. 단단히 삐진 모양이다. 김치전을 부치던 그 날, 모이세스에게도 한입 먹어보라 하고 싶었는데 도저히 눈길을 피하는 통에 맛을 보여줄 수 없었다. 한국이나 외국이나 삐지고 토라지고 하는 건 다 똑같나 보다 정말.  


맵기를 조절하려다 보니 김칫국물은 결국 조금 남았다. 남은걸 버리고 가기도, 싸가지고 가기도 애매해서 고민하는데 니콜라스가 그 비밀 소스는 다시 들고 갈거니? 혹시 우리에게 조금 나눠 줄 생각은 없니? 물었다. 김치도 아니고 국물을 나눠주는 것이 내키진 않았지만, 그래도 남은 비법 소스(!)를 다시 바리바리 싸가지고 가는 것도 정이 없어 보였다. 고민하다 결국 조금 나눠줬는데 이후에 이걸 이용해 또 뭔가 만들어 먹었을지 모르겠다.  

아이들은 마치 내일도 나를 만날 것처럼 대했다. 에두아르도가 그렸다는 그림을 구경하고, 자다 깨서 나온 판초와도 시간을 보냈다. 호스텔 중앙에 있는 큰 TV를 유튜브에 연결해 한국 노래도 몇 곡 들려줬다. 카밀라와 니콜라스는 세계여행을 꿈꾸고 있으니 언젠가 한국에 오면 가이드를 해주기로 했다. 쿠스코에서 마지막 날이 그렇게 흘러갔다.


에두아르도의 판초가 잠에서 깨어 돌아다니고 있다. 안녕. 아우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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