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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Dec 19. 2022

나는 썰세권에 산다.


올해 초 이사한 우리 집은 낮은 산을 끼고 있다. 산이라고 말하기도 어색한 뒷동산 수준이다. 


낮은 뒷동산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등원할 수 있게 해주고 풀벌레 소리, 매미 소리로 여름이 왔음을 알게 해준다. 봄에는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가을에는 색색의 단풍잎으로 존재감을 뽐냈다. 


겨울이 되고 나뭇잎이 하나, 둘 떨어지고 해가 짧아지기 시작하니 뒷동산이 생기를 잃고 어딘가 스산해보이기 시작했다. 


"산이 있이서 그런가, 밤에 좀 무섭지 않아?"

"맞아. 해도 짧아져서 퇴근할 때 지나오려면 좀 으스스하더라고."


봄, 여름, 가을 자연의 아름다움을 선물하고 아이들에게는 신나는 생태놀이터가 되어 준 뒷동산이 해가 짧아지는 겨울이 되자 으스스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혹여나 늦은 시간에 나갈 일이 있으면 일부러 멀리 돌아 산을 피해갔다. 


그런데 그 헐벗은 뒷동산에 오랜만에 생기가 돌아왔다. 


주말 아침,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며 잠시 창밖을 내려다보니 오랜만에 와글와글 아이들 소리로 소란스럽다. 한손에 썰매를 든 아이들이 부지런히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한다. 보아하니 산의 완만한 경사로를 이용해 눈썰매를 타고 있는 것이었다. 


관리인도 없고, 안정망도 없다.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든 이곳에서는 아이들 스스로가 관리인이고, 안전관리 요원이었다. 도시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이색적인 풍경에 동참하기로 했다. 


서둘러 동네 문방구에 들려 눈썰매를 사와 아이들 사이에 끼어본다.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줄을 서고, 앞사람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차례를 지키지 않는 아이들이 있으면 형, 누나들이 자연스럽게 가르친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썰매를 타기에 안전한 자리를 찾아 즐긴다. 


'놀이의 힘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거구나!' 어른들의 간섭없이도 알아서 놀이의 규칙을 만드는 아이들. 

 

어느새 동네 아이들이 하나, 둘 더 모여들기 시작하고 아이는 유치원 친구를 우연히 만나 또 신나게 한바탕 썰매를 탄다. 해가 떨어지도록 하루 종일 눈밭에서 뛰어놀던 아이는 밤이 되자 책을 한페이지 다 읽기도 전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덩달아 나도 오랜만에 아침까지 푹 잤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계절을 더 가까이서 느끼게 된다. 


혼자였다면 굳이 한여름 인파를 뚫고 워터파크에 갈 일이 없었겠지만 아이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향한다. 내리는 눈을 보며 출근길의 고생스러움을 미리 걱정하는 대신 동심으로 돌아가 눈썰매를 타며 소리를 질러본다. 여름이면 물놀이, 겨울이면 눈놀이로 계절을 가까이 느끼는 것도 아이 덕분이다. 


이제는 뒷동산까지 한 몫 더해 이 겨울을 제대로 즐기라고 부추긴다. 


출퇴근길 복잡한 교통대란을 예고하는 경고 문자는 계속해서 울려대지만 이제는 무시무시한 교통대란 보다는 뒷동산에 더 눈이 간다. 이번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서 원없이 썰매를 타볼 수 있기를. 온몸으로 겨울 추위 속 놀이의 묘리를 느낄 수 있기를. 이런 우리 집이 자랑스러운 나는 썰세권에 산다. 


 



 *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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