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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Mar 28. 2023

마흔의 선택 1. 이민

 "중대발표가 있어. 우리 이민 가려고 해."

 "이민? 갑자기 왜?"

 "그러니까 말이야......"


 언니는 나보다 2년 먼저 마흔을 맞았다. 언니의 마흔을 요약하자면 '진퇴양난'이었다.


 남편은 트렌디한 유통회사의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야근이 잦았다. 남편과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대부분 20~30대 젊은이들이 많았다. 아직 정년까지는 한참이 남았지만 유행에 민감한 업계의 특성상 슬슬 남편의 자리가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남편은 앞으로 어떻게 직장생활을 이어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언니도 사정은 비슷했다. 7살, 5살짜리 두 자녀의 양육은 가정주부인 언니의 몫이었다.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까지만 해도 워킹맘이었던 언니는 둘째가 생기면서 일을 그만두었다. 아이를 돌봐 줄 부모님이 안 계셨고, 도우미를 쓰기에는 수지타산이 안 맞았다. 결국 아이를 도맡아 키우기로 했지만 육아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남편의 잦은 야근으로 독박육아를 해야 했던 탓에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다. 가끔은 죄도 없는 아이를 향해 짜증을 쏟아냈고 그럴 때면 언니와 형부는 마주 앉아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으냐며 대대적인 토론을 벌이곤 했지만 답은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이유를 알 수 없이 몸 곳곳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나이 탓을 했다.


 "원래 마흔쯤 되면 몸이 크게 아프더라. 내 친구 00 이는 마흔에 유방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고, 00 이는 자궁에 문제가 생겨서 시술을 하고... 마흔을 잘 넘겨야 돼. 건강에서도 고비가 한번 오더라."


 주변의 조언에 따라 큰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았지만 딱히 이상은 없었다. 의사는 알 수 없는 몸의 통증은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며 각종 진통제를 처방해 주고 운동이나 취미생활을 권하는 누구나 알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과제를 무책임하게 던져주었다. 차라리 어디가 크게 아프다면 고칠 수라도 있을 텐데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던 시점, 언니와 형부는 다시 한번 마주 앉아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두 사람의 고민이 더 깊어진 이유는 큰 아이가 곧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니는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섰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앞날에 대한 것이었다.


 "하굣길에 아이 책가방 들어주며 걷고 있는 엄마들을 보면 숨이 막혀. 나도 곧 저렇게 되겠지. 아이 뒤를 쫓아다니며 가방 들어주고, 학원에서 대기하며 하루를 보내고."


 "그렇게 엄마 인생 다 쏟아부어 아이한테 헌신하니까 아이에게 바라는 게 많이 지는 것도 당연하지. 공부 잘했으면, 인기도 많았으면."


 그런 언니의 고민을 함께 나누던 남편은 지금 상황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몇 가지 대안을 찾았다.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대안은 언니가 일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거나 학원을 돌며 엄마, 아빠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형부가 휴직하거나 회사를 그만두는 방법도 있었다. 이번에는 벌이가 문제였다. 사실상 5년 이상 경력이 단절된 여성의 재취업 자리가 고수입이 될 수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어떤 대안도 찾지 못했다.


 그런 두 사람 앞에 귀인이 나타났다. 십여 년 전 캐나다로 이민을 갔던 사촌언니였다. 두 아이를 모두 대학에 진학시키고 휴가차 한국에 들른 언니부부는 두 사람에게 솔깃한 제안을 했다. 바로 캐나다로의 이민이었다. 캐나다는 심각한 인구감소로 최근 노동인구의 이민을 적극 수용하는 입장이라고 했다. 아이들 영어교육도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며 고민하는 언니에게 캐나다행을 적극 권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이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했지만 생각보다 일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민을 발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과 차를 구했다며 사진을 보여주더니 곧 출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한국에서 살던 집을 정리하고, 가전과 가구를 처분하고, 각종 장난감이며 옷가지들을 버렸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떠났다.


 그렇게 떠난 지 한 달쯤 지나 언니와 첫 영상통화를 했다. 아직 눈이 녹지 않았고 날씨도 너무 춥다며 집 밖에 나간 적이 거의 없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표정이 밝았다. 목소리도 들떠 있었다. 온 가족이 모여 단란하게 저녁식사를 는 모습을 보니 여유로워 보였다. 다행이다.


 언니 가족의 앞 날에 꽃길만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에 살고 있든 사람 사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나이 마흔에 현실을 탓하며 죽는소리만 하고 앉아있는 대신 새로운 돌파구를 향해 도전을 선택한 언니 가족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진심으로 응원한다.  


우리 어디에 있든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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