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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Aug 31. 2023

남편이 엄마의 전화를 피하는 이유

상담이론 중에는 칼 로저스의 인간중심적 상담이란 것이 있다. 상담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할만한 아주 매력적인 상담이론인데 요점은 간단하다. 화려한 상담 기술 보다는 상담하는 사람의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여기서 강조하는 태도는 무조건적인 수용과 공감, 상대를 대하는 진실한 마음이다. 상담자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주는 것만으로 상대는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정혜신님이 쓴 <당신이 옳다>라는 책에서는 상대에게 '충조평판'을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충조평판이란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의 줄임말이다. 이 네가지 반응의 공통점이 있다면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나의 입장만을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두가지 모두 상대를 판단하지 말고 '공감'하라고 강조하는 면에서 맥락이 같다. 


그렇다면 공감이란 무엇일까. 상대의 말에 무조건 열띤 호응을 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면 되는걸까. 


한동안 남편이 아팠다. 치료를 위해 대량의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했는데 그 부작용으로 늘 우울하고 무기력했다. 그런 남편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힘들었다. 감정은 전염되는 속성이 있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은 더욱 그렇다. 퇴근한 남편이 울상을 하고 앉아있는 것을 보며 처음에는 위로도 건네고,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기도 했지만 점점 지쳤다.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나빠져 일부러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남편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시부모님은 자주 전화를 거셨다. 남편을 그 때마다 긴 한숨을 쉬고 전화를 받았다. 가끔은 일부러 피하기도 했다. 곁에서 통화 내용을 듣고 있다보면 남편이 전화를 피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 엄마. 왜?"

"00아. 몸은 어떠냐?"

"괜찮아. 좋아지고 있어."

"(깊은 한숨) 에휴. 내가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참. 에휴. (또 다시 한숨)"

"엄마. 전화해서 한숨 좀 쉬지마."

"(긴 침묵 후 또다시 한숨) 에휴. 알았다. 쉬어라."


보통 전화의 패턴은 이랬다. 남편의 컨디션이 좋은 날은 조금 더 대화가 이어지기도 했지만 이야기의 패턴은 늘 비슷했다. 어머님의 걱정과 한숨,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남편의 말, 반복되는 어머님의 걱정과 한숨, 남편의 짜증 이런 식이었다.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있는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덕분에 통화를 끝낸 남편은 더욱 기분이 안좋아지곤 했다. 남편과의 통화가 시원치 않을 때면 시부모님은 종종 나에게 전화를 거셨는데 그 때도 패턴은 비슷했다. 그럼 나도 서둘러 전화를 끊을 구실을 찾았다. 


아들이 아프다고 하니 걱정되지 않는 부모가 어디있겠는가. 어머니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걱정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 보다는 아들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공감이다. 나의 입장을 내세우기 보다는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마음. 어머님의 한숨은 그걸 놓쳤다. 아들이 아파서 걱정되는 본인의 마음만 한숨으로 전달했을 뿐 아들의 감정이나 마음 상태를 살피지 못했다. 그것이 어머님의 전화가 아들에게 위로가 아닌 부담이 된 결정적인 이유다.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이 도리어 위로를 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아들이 지쳐버린 것이다. 


누군가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를 해주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는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나의 어줍지 않은 위로가 상대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워 연락하기가 어려워지고 어떤 말도 꺼내기 어려워질 때가 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 상대에게 받고 싶은 위로는 무엇인가. 그저 가만히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상대가 나의 깊은 하소연을 묵묵히 들어주는 것만으로 우리는 스스로 감정이 해소될 때가 있다.


우리는 모두 '임금님은 당나귀 귀'를 외칠 숲이 필요하다. 숲은 우리에게 어떠한 충고도 전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들어주고 품어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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