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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Oct 22. 2023

아들이 색약입니다.


아이와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네가지 색깔의 구슬을 한 곳에 섞어두고 같은 색깔의 구슬을 모으면 이기는 아주 단순한 게임이었다. 승부욕을 불태우며 빠르게 움직이는 눈동자와는 별개로 아이의 손이 자꾸 이상한 곳으로 향한다.


"00아, 초록색을 골라야 되는거야. 초록색."

"나도 알아."


또렷한 대답과는 달리 아이는 자꾸 빨간색을 골랐다 초록색을 골랐다하며 헷갈려한다.


마음이 불안해진다. 색칠놀이를 할 때도 종종 비슷한 일이 있었다. 파란색과 보라색을 헷갈려한다든지 초록색 나무를 갈색으로 칠할 때도 있었다. 아직 어려서 그러려니 했지만 주변 아이들을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불안하던 참이었다.


영유아검진에서 시력검사를 받으라는 안내를 받고 안과를 방문했다. 망설이다 의사선생님께 조심스럽게 여쭤보았다.  


"선생님, 이 나이에도 색약검사를 할 수 있나요?"


선생님은 곧 작은 책자를 꺼내 검사를 시작했다. 초록색 점자 사이에 주황색 점자로 숫자가 표기되어 있었다. 어쩐 일인지 아이는 하나도 읽지를 못한다.


"숫자를 알고 있나요?"

"네. 숫자는 다 아는데......"


선생님의 표정에서 벌써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어머니, 아이가 어려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색약이 있는 것 같네요. 보통 유전인데 가족 중에 색약이 있나요?"


너무 걱정마세요.

아이가 디자이너나 화가될 거 아니면 사는데 전혀 지장없어요.

괜한 검사를 만들어서 엄마들 걱정하게 만들고 안 해도 그만인 검사예요.


의사는 나를 위로하려는듯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모자라 나의 관찰력을 추켜세웠다.


어머니 참 대단하시네요.

이렇게 어린 나이에 집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은데.

아이에게 관심이 참 많으시군요. 훌륭하세요.


이야기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색약. 색약이라고.


'아이가 보는 세상은 어떤 색깔인걸까?'


내가 보고 느끼는 것과 아이가 보는 것이 다르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그 후로도 여러 안과를 돌아다니며 매년 검사를 반복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픽사베이


열등감을 연구한 심리학자 아들러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으로 대중에게 친숙한 심리학자 아들러는 열등감 극복을 인생의 과제로 보았다.


그가 열등감에 주목했던 이유는 본인도 어린 시절 심한 열등감을 느끼며 자랐기 때문이다. 아들러의 어머니는 그보다 능력이 뛰어난 첫째에게 관심을 쏟았다. 곧이어 동생이 태어나자 첫째에게 쏟던 사랑은 동생에게로 옮겨갔다. 아들러는 그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자랐다.


게다가 몸이 약했던 아들러는 구루병을 앓으며 죽을 고비를 두번이나 넘겨야했다. 작은 키, 불룩 나온 배, 나쁜 시력, 낮은 학교 성적 등으로 성장기 내내 열등감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 열등감을 그가 개인심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아들러는 열등감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열등감을 잘 발전시키면 인간이 노력을 추구하게 하는 동기유발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가진 것 보다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고 성장하는 원동력이 열등감이라고 본 것이다. 물론 그것이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본인 스스로가 열등감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색약이면 어때


베토벤은 청력을 상실한 이후에도 꾸준히 작곡을 했고, 모네는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가운데도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색약은 분명 열등한 기능이지만 그로인해 아이가 남들과는 다른 독특한 시선을 갖게 된다면 오히려 아이의 개성이 될 수도 있다.


개그맨 신동엽은 적녹색약이다. 얼마 전 그의 유튜브에서 출연 배우가 볼터치를 하고 왔다며 볼이 빨갛지 않은지를 묻는데 신동엽은 너무나 유쾌하게 "나는 적녹색약이라 그런거 몰라" 하는거다.



일순간 어색할 수 있는 분위기를 재치와 웃음으로 가볍게 넘기자 여배우도 따라 웃었고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그를 보며 프로이드가 말한 방어기제 중 '유머'는 저렇게 쓰는거구나 싶어 속이 시원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태어나면서부터 알록달록한 세상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는 이렇게 보이는 세상이 너무나 당연하다며 전혀 불편한 일이 없다고 한다. 그를 보며 우리 아들도 저렇게 당당하기를 바랐다.


색약이란 사실,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아들은 색약이 무엇인지, 자신이 보는 세상이 다른 아이들과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른다. 신동엽의 말대로라면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보였으니 크게 불편할 것도 없다.


엄마의 괜한 죄책감이나 불안으로 아이에게 잘못된 생각을 심어줄 필요가 없다. 다만 엄마로서 아이가 당황스러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사실은 이야기해야한다.


아들아, 너는 색깔 구분이 어려워.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어.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야.

선생님께는 엄마가 이야기할거야.

그러니 도움이 필요할 때는 선생님께 꼭 이야기하렴.

색칠을 할 때 색깔이 헷갈리면 색연필에 써있는 글씨를 먼저 확인해. 그럼 실수하지 않을거야.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바뀔 때마다 가장 먼저 색약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색약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단체생활을 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다보니 색약이라는 사실을 남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굳이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아뿔싸. 미술학원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아이가 색을 자꾸 이상하게 칠해서 장난하지 말라고 하니 자신은 색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더란다. 어머니도 알고 계셨냐며 너무 놀란 표정으로 물으셨다.


선생님, 죄송해요. 아이가 색약이에요.

미리 말씀드리는걸 깜빡 했네요.


그렇다. 이제는 색약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릴 만큼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을 안다. 아이도 자신이 색깔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다행히 미술에는 소질이 없어 그쪽으로 진로를 결정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요즘처럼 울긋불긋한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 가끔 생각한다.


'우리 아이는 단풍나무의 붉은 잎이 어떻게 보일까? 이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까? '


엄마 마음은 어쩔 수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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