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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Oct 28. 2023

딸, 돈 좀 있니?

평일 낮.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한가로이 점심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중에 진동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친정아빠였다. 


'어? 무슨 일이지?'


우리 부녀는 성격이 꼭 닮았다. 그 성격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정도.


내성적인 성격에 말수가 적고 자존심도 강한 편이라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잘 못한다. 그런 우리 부녀가 소통하기 위해서는 항상 엄마가 필요했다. 엄마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잘도 표현하는 사람이다.  


"엄마, 아빠는 이번 생신에 무슨 선물이 필요하데?"

"아빠가 티셔츠가 하나 필요하다는데."

"엄마, 지난 생일 선물을 아빠가 마음에 들어하셔?"

"응. 좋아하시더라 고맙다고 전하래."


사소한 일도 서로에게 전화를 걸지 못하고 엄마를 통해야만 하는 우리지만 나는 아빠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빠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 완벽히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이'다. 


그런 아빠가 평일 대낮에 나에게 전화를 건다는 건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빠, 무슨 일이예요?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하시고?"

"어...... 밥은 먹었어? 00이는 학교 잘 갔고?"


할 이야기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아빠는 어색하게 안부를 물으며 말을 빙빙 돌렸다. 그러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대뜸 물었다.


"딸, 돈 좀 있어?"

"이번에 세를 빼줘야 하는데 천만원이 부족해서. 엄마한테는 말하지 말고. 사람 들어오면 금방 갚을게. 돈 좀 있으면 잠깐 빌려줘."


아빠가 어떤 심정으로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고 계실지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더는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알겠다고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아빠는 혹시나 엄마가 알게 되면 상황이 난처해질까봐 엄마에게는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코로나 이후 아빠는 일을 쉬고 계신다. 한 때는 잘 나가는 사업가였지만 경기침체와 세월에는 장사가 없었다. 그래도 일찍이 마련해둔 부동산으로 월세를 받으며 생활을 이어가고 계셨다. 그런데 세입자가 새로 구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돈을 빼줘야하는 상황인 모양이다. 


사실상 친정의 모든 재정관리는 엄마가 맡고 있다. 엄마에게 사정을 이야기해야 하지만 근 2년간 집에 제대로 된 수입을 가져다 준 적이 없는 아빠는 엄마에게 면이 서지 않아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카터와 맥골드릭의 가족생활주기


카터와 맥골드릭은 6단계로 나누어 가족생활주기를 설명했다. 결혼과 출산을 기본 전제로 하는 것이라 오늘날의 가족을 설명하기는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일단 결혼과 출산을 모두 겪은 이들에게는 유용한 이론이다. 


1단계는 결혼전기로 성인이 경제적, 정서적으로 부모님에게서 독립하고 원가족과 분리되는 단계를 말한다. 


2단계는 결혼적응기로 결혼을 통해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시기다. 이 때는 나의 원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이 나의 배우자를 수용해줌으로써 부부 관계를 견고히 다져나가야 하는 시기다. 


3단계는 자녀아동기로 출산으로 인해 가족 내의 자녀라는 새로운 구성원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시기다. 부모로서의 역할을 새롭게 수행하고 조부모의 역할이 포함된 확대가족관계로 잠시 회복하는 시기다. 


4단계는 자녀 청소년기로 사춘기 자녀를 둔 가족을 말한다. 자녀의 독립을 지지하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변화하는 것에 적응해야 한다. 또 중년을 맞은 부부는 직업에 대한 재인식과 노년세대에 대한 배려를 가져야 하는 시기다. 


5단계는 자녀 독립기로 성인이 된 자녀와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자녀의 배우자, 손자 등을 포함해 가족관계가 다시 정비되는 시기다. 조부모의 신체적, 정신적 쇠약과 죽음에 대해서도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6단계는 노년기로 나의 육체적 쇠약에 관심을 가지고 중년세대가 사회의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지해야 하는 시기다. 배우자, 동료, 형제 등의 상실과 자신의 죽음도 대비해야 한다. 


이 단계에 따르면 나는 자녀아동기를 지나 자녀 청소년기를 맞이 하는 중이다. 자녀의 독립을 지지하는 동시에 나의 부모에 대해 재인식하고 배려를 가져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아빠에게 돈을 송금하고 여러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처음에는 약해진 아빠의 현재 모습과 과거 세상을 호령할듯 당당했던 아빠의 과거 모습이 겹쳐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아빠도 늙었구나 싶었다. 두번째는 그래도 내가 살 만해서 돈을 빌려드릴 수 있으니 참 다행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아빠, 엄마가 노후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경제적 도움을 계속 드려야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생각에 미쳤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나와 부모님은 지금 새로운 가족생활주기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부모님에게 받기만 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어느덧 내가 부모님을 도와드려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명절 때마다 드리는 용돈을 기필코 안 받으시겠다며 돌려주던 부모님이 작년 명절부터는 고맙다며 받아들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우리 관계는 서서히 변하고 있다. 


내가 부모님께 받은 그 수많은 사랑과 희생을 다 갚을 수는 없을거다. 부모님이 내게 그랬듯이 나는 내 자식을 사랑으로 잘 키워내는 것이 보답이고 내리사랑일테지. 


하지만 내가 내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의 1/10 만큼이라도 늙어가는 부모님을 사랑하고 아껴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더 건강하고 올바른 정신으로 깨어있어야 할 것 같다. 


잘 살아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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