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 변두리에서 자랐다. 동네에서 발레학원을 본 적이 없다. 배우는 친구도 당연히 만나보지 못했다. 왜 우리 동네에는 발레학원이 없었을까? 성인이 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수지타산이 안 맞았겠지. 서울 변두리에 살며 아이에게 발레까지 가르칠 만한 형편의 집은 많지 않았을 거다. 성인발레를 배우며 어릴 때 무용을 했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놀라웠다. 내 주변에는 한 명도 없었는데. 그때마다 무용을 그만둔 이유를 물어보았는데 부상 때문이거나 실력의 한계 또는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예체능 전공으로 키워낸다는 건 돈도 돈이고 엄청난 모험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부터 발레라는 무용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몇몇 연예인이 다이어트의 성공 요인으로 '발레'를 꼽으면서부터일까? 강수진 발레리나가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은퇴하고 귀국하면서부터일까? 아니면 국내 무용수들이 속속 해외로 진출하면서부터일까? 시작은 분명하지 않지만 예전보다 대중화된 것은 확실하다. 동네를 통틀어 하나를 찾기 힘들던 발레학원, 무용학원이 이제는 흔하게 보인다. 내가 살던 동네에도 꽤 큰 규모의 발레학원이 생겼는데 5년 넘게 잘 운영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솔직히 발레학원이 생길 때 나는 학생이 있을까 싶어 걱정했었다.)
필수코스가 된 발레, 하지만 여전히...
여자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을 만나보면 이제 발레는 필수코스가 되었다. 여자아이들에게 꼭 찾아온다는 공주병 시기. 너도 나도 치마에 구두를 신겠다는 그때가 오면 엄마들은 발레교실의 문을 두드린다. 처음은 주로 백화점이나 쇼핑몰 문화센터에서 시작한다.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발레교실이 있는데 생각보다 신청 경쟁이 치열하다. 작은 아이들이 분홍 발레복에 타이즈를 신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면 보는 내가 다 흐뭇한데 그 아이들 부모는 오죽할까. 게다가 발레 선생님은 하나같이 어찌나 예쁜지. 우아한 클래식 음악까지 더해 눈호강 귀호강을 제대로 한다. 호기심에 발레를 시작했던 아이들 중에는 초등학교에 가서도 그 무대를 학원으로 옮겨 배움을 이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본격적으로 콩쿨에 나가는 아이들도 보인다.
그런데 그 아이들도 어느 시기가 되면 약속이나 한 듯 발레를 그만둔다. 본격적으로 학업이 시작되면 예체능에 쏟을 시간과 비용이 나지 않을 거다. 또 예쁜 발레리나에 반해 시작은 했지만 막상 하다 보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고 그만두기도 한다. 막상 아이가 재능을 보인 다고 해도 평범한 부모 입장에서 전공을 시키기에는 큰 결심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예쁜 나이에 공주 같은 옷을 입고 고운 화장을 하고 무대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사진이나 동영상에 실컷 남기는 것으로 만족하며 대다수의 아이들이 발레와 멀어진다.
직장에서는 발레 영재를 지원하는 장학 프로그램을 기획했었다. 처음에는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아이를 찾아 지원하자는 것이 취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집안 사정이 어려우면서 실력도 뛰어난 발레 영재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결국 경제력은 배제하고 실력으로만 장학생을 추려야 했다. 그만큼 전공으로 이어져 직업무용수가 될 때까지 아이를 지원하기에는 여전히 큰 비용이 든다는 이야기일 거다.
발레는 비쌀 거라는 편견, 성인발레는 다르다.
이런 이유로 처음 성인발레를 시작할 때 막연히 비용이 비쌀 거라고 생각했다. 기우였다. 성인발레 비용은 생각보다 합리적이었다.
일단 학원비는 주 2회 수업 기준, 월 13~15만 원 선이었다. 아이 한 달 태권도 비용 정도다. 1회 수업에 보통 60~70분 수업을 하고 길게는 90분까지 하는 곳도 있다. 지역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겠지만 동네 학원에서는 수업당 학생수가 10명을 넘지 않았다. 어떤 학원에서는 2명이서 수업을 들은 적도 있다. 개인 레슨이나 다름없었다.
취미는 장비 빨. 장비를 마련하는 비용도 욕심만 버린다면 무리가 될 정도는 아니다. 먼저 발레슈즈. 옷은 레깅스를 입어도 슈즈는 꼭 필요하다. 보통 발레 하면 토슈즈를 떠올리지만 아무나 신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은 천 슈즈를 신고 시작한다. 슈즈 비용은 1만 원대부터 다양하다. 옷은 필수는 아니지만 보통 레오타드라는 발레복을 입는다. 레오타드, 타이즈, 스커트가 기본 구성인데 값이야 천차만별이지만 저렴한 건 3벌에 3만 원 선에서 끝낼 수 있다. 내가 가장 자주 입는 레오타드는 18,000원이었고 타이즈는 4,000원이었다. 스커트는 9,000원. 합이 31,000원이다. 물론 비싼 옷은 비싸다. 브랜드, 디자인, 컬러 등도 다양해서 레오타드의 세계에 한번 빠지면 돈 쓰는 건 일도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운동복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하지만 욕심만 버린다면 만 원짜리 레오타드도 괜찮다. 세탁기에 막 돌려 빨아도 1년 넘게 입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하다. 옷이 질릴 때면 레오타드를 사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티셔츠나 워머, 스커트로 변화를 주며 다양하게 코디하면 된다.
성인 발레, 한(恨)을 푼다.
필라테스, PT, 요가, 수영 등. 선택할 수 있는 운동의 폭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있는 요즘. 발레만이 가진 매력을 꼽자면 공주놀이다. 아름다움, 예쁜 것에 대한 한을 푸는 일.
분홍 티셔츠를 사고 싶던 내게 "남동생에게 물려주려면 분홍색은 안된다." 던 엄마에게 매친 한, 무대 위를 활개 치며 다니는 발레리나를 꿈꾸던 사람에게 "이제는 공부할 때니 춤은 그만두거라." , "무용은 돈이 많이 들잖니. 우리가 뒷받침하기에는 힘들 것 같다. 미안하다." 하시던 부모님에게 매친 한. 인기 많고 예쁜 친구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예뻐지고 싶다'라고 속으로만 생각하며 삭힌 한. 그 한을 푸는 일.
전신 거울 앞에 서서 평소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과감한 옷을 입고 심지어 분홍 타이즈를 신은채 도도한 척 턱을 치켜세우고 서 있는 일. 그런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 그 시간이 나의 한을 풀어준다. 어릴 적 못다 한 공주놀이의 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