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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Jun 09. 2022

통장쪼개기 - 총알 준비를 위하여

 30대 후반, 내 명의의 신용카드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다. 알뜰해서? 아니다. 내가 나를 못 믿어서다. 나는 10만 원이 넘어가는 물건을 살 때는 망설이고 고민하고 쭈뼛대지만 의외로 일상에서 1~2만 원 하는 물건들은 생각 없이 잘 산다. 매일 인터넷으로 아이쇼핑을 한다. 하나의 취미다. 여윳돈이 생기면 언제든 살 수 있도록 항상 장바구니 가득 이것저것 담겨있다. 그래서 신용카드를 안 만들었다. 신용카드가 생기면 막 사게 될 것 같아서. 나를 믿을 수가 없었다. 신용카드를 잘 만들어서 여러 가지 혜택을 부지런히 찾아 쓰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나는 그러지를 못한다. 카드 혜택은커녕 집에서 쓰는 인터넷도 한번 가입하면 끝까지 가는 귀차니스트다.


 이런 내가 한 집안의 살림을 맡았다. 맞벌이를 하던 신혼부부 시절에는 남편이 번 돈으로 생활비를 하고 내 돈으로 저축을 하면서 살았다. 외벌이가 된 후로는 남편 용돈, 보험료, 재테크 비용을 제외한 나머지 돈은 내가 관리하고 있다. 투자나 돈을 불리는 재테크는 나보다 남편이 더 재능이 있어 남편이 주로 그쪽을 담당하고(그래 봐야 소액의 주식투자가 전부다) 나는 아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신용카드는 한 장도 없지만 내 명의의 체크카드는 지갑 가득이다. 고정지출, 교육비&도서구입비, 생활비, 비상금, 개인용돈카드까지. 세부항목에 따라 서로 다른 체크카드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주는 돈을 매달 일정 금액씩 쪼개어놓고 그 예산 안에서 소비를 하는 것. 그것이 못 미더운 나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1. 고정지출 통장


 여기에는 통신비, 보험료, 렌탈비가 들어있다. 말 그대로 고정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이다. 매달 같은 금액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정확한 금액만큼 계산해서 통장에 넣어두고 자동이체를 신청해두었다. 이렇게 하면 잔액이 부족하거나 인출 날짜를 깜빡해서 실수하는 일이 없고 무엇보다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편하다. 고정지출 외에는 지출할 여윳돈이 들어있지 않으니 계좌만 연결해두고 카드는 따로 만들지 않았다.


2. 교육비 & 도서구입비 카드

 

 교육비와 도서구입비의 수입원은 남편의 월급 일부와 나라에서 주는 아동수당이다. 먼저 아동수당만 입금되는 통장이 따로 있다. 그 통장에는 순수하게 아이 수당만 들어있다. 입금되는 10만 원 안에서 매 달 한글과 영어도서를 구입한다. 대부분 중고서점이나 온라인 중고거래를 이용하기 때문에 10만 원이면 충분하다. 도서구입비가 남는 달에는 교육비 통장에 옮겨놓는데 고가의 전집처럼 목돈이 들어갈 때 쓰기 위함이다. 사교육비는 현재로서는 유치원 비용과 패드 학습비가 유일하다. 이 둘 모두 아이가 더 어렸을 때부터 교육비 통장에 일정 금액씩 모아두었던 돈으로 한 번에 지불했다. 지금도 앞으로 학원을 보내게 될 것을 대비해 매 달 일정 금액을 교육비에 따로 저축하고 있다.


3. 생활비


 생활비는 앞에 지출과는 조금 다르다. 매월 일정 금액을 정해놓고 쓰긴 하지만 예산을 넘기는 달이 많다. 늘 생각지 못한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관리비만 해도 계절별로 편차가 크고 그때그때 사야 하는 물건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매번 부족한 게 생활비다. 생활비는 유일하게 예산보다 액수를 조금 넘기더라도 크게 스트레스받지 않으려고 애쓴다. 다만 얼마나 초과 사용했는지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때문에 체크카드에 일정 금액을 생활비로 넣어두고 쓰다가 체크카드 한도 초과가 되는 순간부터 여분의 비상금을 사용하고 초과된 비용을 매달 체크한다. 생활비에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를 넣어두고 금액에 맞추려 전전긍긍하면 오래가지 못한다. 일정기간 가계부를 작성해서 나의 소비패턴과 대략의 지출금액을 파악한 뒤, 그 금액에서 한 끼 외식비를 줄이는 정도의 비용만큼만 빼고 사용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4. 비상금


 아무리 계획적으로 소비한다 해도 인생이 계획대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갑자기 병원에 가야 하거나 가전제품이 고장 나 버리는 등 목돈이 들 때가 있다. 이럴 때를 위해 매달 일정 금액을 비상금으로 따로 저축해둔다. 말 그대로 비상상황에 이 통장이 있으면 든든하다. 하지만 월급만으로 비상금까지 넉넉히 저축해두기는 쉽지 않다. 이럴 때는 비상금 통장을 만들어두고 평소에는 아주 소액만 저축을 하다가 월급 외에 보너스를 받았거나 예상치 못한 수입이 생겼을 때 수입의 20% 정도를 비상금으로 모아두는 방법이 있다.


5. 개인용돈카드


 내가 전업주부가 되었을 때 나를 아끼는 친척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꼭 비상금을 만들어야 돼. 안 그러면 나중에 빤스 한 장 니 맘대로 못 사 입는다!"


 슬프지만 너무나도 현실적인 조언이다. 실제로 계획했던 것 외에 추가 지출이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금액을 줄이게 되는 게 내 용돈이다. 하지만 전업주부에게도 숨기고픈 사생활은 있는 법. 이건 순전히 나를 위해 쓰는 돈이다. 소소하게 커피를 사 마시거나 점심을 사 먹고 싶을 때, 개인용 돈이 없어 생활비 카드를 써야 한다면 은근히 눈치가 보인다. 그래서 지역 카드를 적극 활용한다. 지역화폐는 보통 충전금액의 10%를 인센티브로 지급한다. 발레 학원비와 생활비 일부를 지역화폐에 충전해두고 거기서 나온 10%의 인센티브는 커피를 마시거나 점심 약속이 있을 때 사용한다. 가끔은 신랑에게 "오늘은 내가 쏠게!"라며 3,000원짜리 커피 한잔 정도 살 수 있는 것도 지역화폐 덕분이다.


6. 일반 저축통장


 마지막으로 일반 저축통장이다. 1년 단위로 적금만 들고 있다. 금액이 크지는 않지만 목돈이 필요할 때 당황하는 남편에게 "내가 이만큼 모아두었어."라고 말하고 싶어서 매월 조금씩이라도 저축하고 있다. 중요한 건 생활비를 쓰고 남는 돈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비로 지출하기 전, 일정 금액을 꾸준히 저축하고 이 돈은 없는 돈이다 생각하고 지내는 것이 핵심이다.


 혹시 오해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통장이 6개나 있는 걸 보면 소득이 높은가보다 하고. 아니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2년 1분기 월평균 가구소득은 482만 5,037원이라는데 우리 집은 이것보다 하위 수준이다. 통장 쪼개기의 핵심은 돈이 많아서 나누는 것이 아니다. 목적에 따라 예산을 짜고 계획 있게 소비하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입이 100만 원이든 200만 원이든 상관없이 각자 상황에 맞게 예산을 짜 보고 쪼개어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다. 또 한 번 예산을 정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점검하고 상황에 맞게 다시 조정하는 일도 필요하다.


 덧붙여 한 가지 주의할 점! 이렇게 산다고 해서 갑자기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없던 집이 생기고 고급 외제차를 살 능력이 생기지는 않는다. 나는 그런 벼락부자가 되는 방법은 모른다. 다만 매달 생각 없이 지출하던 소소한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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