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이 Jun 28. 2022

다시 태어나도 결혼하시겠습니까?

 오랜만에 본방 사수하고 싶은 드라마가 생겼다. 첫 방송을 손꼽아 기다리며 알람까지 맞춰놓았지만 결국 본방은 놓쳤다. 8시 30분부터 아이를 일찍 재우기 위해 온 집 안의 불을 다 끄고 침대에 누워 책을 열댓 권도 넘게 읽었다. 아이는 엄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10시가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잠든 아이 품을 몰래 빠져나와 텔레비전을 켜니 이미 드라마는 한창 진행 중이다. 그냥 포기하고 텔레비전을 껐다.       


"왜 그냥 꺼? 보고 싶었다며?"

"중간부터 보면 나중에 처음부터 볼 때 재미없어. 그냥 다음에 한 번에 볼래."

"그럼 나 보고 싶은 거 본다."      


 빠르게 리모컨을 누르던 남편의 손이 스포츠 중계를 하는 채널에서 멈춘다. 스포츠에 별로 흥미가 없는 나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한다.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드라마 한 편 내 마음대로 보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생각해보면 좋아하는 드라마의 본방사수는 물론,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는 '바다탐험대 옥토넛'이었다. 울적한 남편을 위해 마블 시리즈를 보라고 양보하고 나는 아이와 둘이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본 일, 그게 마지막 영화관이었다.      


 결혼하지 않았다면 조금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그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글쎄. 잘 상상이 안된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엄청 특별할 것 같지도 않다. 다니던 회사를 계속 다녔을 거고 과장 진급을 앞둔 연차가 되었겠지. 대학원에 진학해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매년 휴가 때마다 해외여행도 다녔을 거다. 하지만 그건 정말 원해서였을까? 아니면 뭐라도 해야 안심이 되니까? 혹은 남들도 다 하니까?

지금보다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훨씬 여유가 있을 테니 계절마다 옷, 가방, 신발들도 색색별로 구비해두고 사고 싶은 발레복도 마음껏 샀을 거다. 하지만 지금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학원에 나가기는 힘들겠지. 회사 일이라는 건 예측하기 힘든 법이니까. 써놓고 보니 결혼하지 않은 삶이 특별히 부러울 것도 없어 보인다. 딱 하나 부러운 것이 있다면 발레복을 마음껏 살 수 있다는 것. 매일 밤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구매 버튼을 누르지 못한 레오타드가 열 벌쯤 되니 말이다.


나란 인간은 이렇게 소박한 사람이란 말인가.      


 아니다. 나는 참 욕심 많은 사람이었다. 남들이 한다고 하면 다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친구가 유럽여행을 가면 나도 당장 티켓을 끊어야 했고 동료가 좋은 옷을 입고 오면 어디서 산 옷인지 찾을 때까지 검색을 하는 사람이었다. 질투는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기르며 참 많이 변했다. 미혼일 때는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결혼을 하고는 참 소중하게 다가왔다.  

    

 예상보다 일찍 잠든 아이 덕분에 갑작스럽게 생긴 저녁시간의 여유. 미혼일 때 느끼던 워라밸과는 차원이 다른 소중함이었다. 남편 몰래 숨겨둔 비상금으로 사고 싶던 옷을 사는 일은 회사에서 보너스를 받아 명품을 사던 때와는 다른 의미로 행복했다. 아이의 학원비를 아껴 등록한 발레학원에서는 1분 1초라도 더 열심히 배워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절로 들었다. 미혼일 때 취미 삼아 등록해놓고 피곤하다며 어영부영 다니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자세다.


 결혼을 통해 자유를 구속당하고 누리던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그것을 소유했을 때의 행복감, 만족감을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 결혼을 통한 '결핍'은 곧 일상에서 누리는 사소한 일들의 감사함을 깨닫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일상의 소중함을 안다는 것은 마음이 공허한 날보다 충만해지는 날이 더 많아지는 일이었다.        


 아직 주변에 미혼인 친구들이 많다. 그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면 나도 모르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을 준다. 괜히 전업주부로 살고 있는 나를 딱하게 생각할까 봐 온몸으로 외친다. 지금 이대로도 행복하다고. 하지만 친구들이 결혼해서 좋으냐고 다시 태어나도 결혼할 거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오래전에 이미 정해놓았다.   

   

"결혼? 좋은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 그런데 다시 태어나면 결혼은 안 할 거야."      


 그렇다. 다시 태어났는데 굳이 또 결혼을 해야 할까? 한 번이면 됐다. 다음 생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다 해보며 막 살 거다. 엉망진창으로. 하루 종일 늘어지게 밀린 드라마나 보고 이것저것 재지 않고 끌리는 사람 있으면 다 만나보고 월급날에는 두둑한 카드 챙겨 마음껏 쇼핑도 하고 레오타드는 신상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다 사보는 그런 삶을 살 거다. 다음 생에는 꼭 그렇게 살 거다. 하지만 그건 다음 생이 있을 때 이야기고. 이번 생은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고 마음 충만해지는 사람으로 살아보기로 했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어차피 후회는 남는 법이니까.



* 사진출처 :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이렇게 말하면 꼰대 같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