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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Jul 04. 2022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 1편.

백발이 되어서도 발레슈즈를 신는 할머니

당신 노망 났소? 아니면 미치기라도 한 건가. (중략)
아니 그냥 등산이나 다니고 나랑 영화나 보러 다니면 되지
꼭 이 딴 거 입고 그 짓을 해야겠냐고. 그냥 곱게 늙어야지.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요."


                                                  tvN 드라마 <나빌레라> 해남의 대사 중에서


 덕출은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날아오르고 싶다며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런 덕출을 보고 아내 해남은 가위를 집어 들고 발레복을 갈퀴 갈퀴 찢으며 반대한다.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보고 산책이나 하며 곱게 늙으라고 화를 낸다. 덕출은 포기하지 않는다. 반대보다 두려운 건 하고 싶은데 못하는 상황이 오거나 하고 싶은 게 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상황이라며 명언을 남긴다. 


 나는 덕출처럼 늙고 싶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보다는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 나이. 그 나이에도 기꺼이 새로 시작하고 싶다. 하고 싶은 게 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때가 오기 전까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며 살고 싶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 올 때까지 꾸준히 하고 싶다. 덕출처럼 나이 들고 싶다. 


출처 : tvN 나빌레라 공식 홈페이지




 현역 발레리나도 은퇴를 고민한다는 나이에 발레를 시작했다. 처음 학원에 갔을 때, 가장 놀란 것은 수강생의 평균 연령이었다. 아주 어린 친구들이 있을 거라는 예상과 정반대였다. 내 또래의 아기 엄마부터 대학생을 둔 주부까지 다양했다. 나는 함께 수업을 듣는 언니들을 보며 결심했다. 내 나이 50, 60세에도 발레복을 입고 춤을 추겠노라고. 부드러운 목선 대신 목주름이 먼저 눈에 띄고 가녀린 팔뚝 대신 늘어진 팔뚝살에 시선이 가는 나이가 되더라도 기꺼이 발레복을 입고 춤을 추고 싶다.  


 나이가 들어 시작한 취미는 체면이랄 게 없다. 경쟁도 무의미하다.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한다한들 무대에 오를 일도 콩쿠르에 나가 상을 타는 일도 아마 없을 것이다. 오로지 내 만족만 있을 뿐. 그러니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고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런 면에서 편하다. 불필요한 경쟁을 할 이유가 없다. 


자기와 상황이 너무 다른 남들과 나를 비교하거나 질투하는 건 
40대로선 해서는 안 되는 짓이야.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 임경선 요조 지음 , 문학동네 


      

 나이를 먹는 일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싶다. 하지만 마음만은 청춘이라며 말로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다. 소파에 누워 TV를 켜는 대신 발레슈즈를 신고 나가 플리에를 하고 싶다. 무릎 관절이 시큰댄다면 플리에 대신 폴드 브라를 하면 되지. 나는 그렇게 늙고 싶다.       


 성인 콩쿠르에 나갈 정도로 열심이던 회원이 요즘 들어 보이지 않는다. 토슈즈를 신고 콩쿠르 준비를 하다 부상을 입어 지금은 아예 수업에도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는 입을 모아 말했다. 


"그래. 오래 하려면 무리하지 말아야 돼. 비교하지 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


 맞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무리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다 싶은 순간 딱 0.1초만큼의 오기를 부린다. 그들과의 비교는 무의미할지라도 어제의 나보다는 조금 더 잘하고 싶으니까. 




  백발의 노인은 휠체어에 앉아 있다. 몸은 굽었고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그녀는 과거 발레리나였다. 과거가 어땠든 지금 그녀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그 쓸쓸한 기운이 카메라 밖까지 전해진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음악이 흘러나오자 그녀의 표정에 생기가 돈다. 소리를 키워달라며 손짓한다. 젊은 시절 이 음악에 맞춰 수없이 무대에 올랐으리라. 그녀는 무대 위 발레리나가 된 듯 고개를 들고 손을 뻗는다. 그녀의 이름은 마르타 곤잘레스. 그녀는 1960년대 뉴욕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였다. 


 삶의 마지막 순간 알츠하이머로 많은 기억을 잃었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 춤을 추는 모습은 영상을 통해 퍼져나갔고 많은 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 그 영상을 촬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출처 : 유튜브 채널 Primera Bailarina - Ballet en Nueva York - Años 60 - Música para Despertar


 나는 이렇게 늙고 싶다. 구부정한 자세에 어정쩡한 손짓이라도 좋다. 다리를 움직일 수 없다면 팔의 움직임만으로도 괜찮다. 백발의 노인이 되어서도 우아한 발레리나를 상상하며 춤을 추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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