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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Jul 05. 2022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 2편

자식과 나를 분리하여 살아가기

이제 너희들은 다 키웠으니까
이제 내가 좀 커야겠다.
 도움을 청한 거죠. 아이들한테.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박혜란 편 중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아들 셋을 낳고 전업주부가 된 한 여성. 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아이들을 앉혀두고 그녀가 한 말이다. 아직 한창 손이 갈 나이의 아이들을 두고 이제는 내가 좀 커야겠다고 도움을 청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 만 하다. 그녀는 아들 셋을 모두 서울대에 보낸 여성학자이자 작가 그리고 이적의 어머니 박혜란이다. 가족이 모두 서울대 동문이라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이력을 가진 그녀. 그녀가 쓴 책은 항상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강연은 늘 만석이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아들 셋을 모두 서울대에 보낼 수 있는지 그 비법을 궁금해했지만 정작 그녀는 자식들이 알아서 잘 자라주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녀의 베스트셀러 제목도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이다.


이적이 밝힌 에피소드도 인상적이다. 비 오는 날 한 번도 우산을 가지고 학교에 마중 나온 적이 없었다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 덕분에 비를 맞으며 '한번 젖으면 다시 젖지는 않는구나'를 깨우쳤다는 아들. 역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과 자식의 삶을 철저히 분리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방치했다는 뜻이 아니다. 자식들을 위해서만 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녀는 이제 내가 좀 커야겠다고 선언한 뒤 뒤늦게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다. 그녀 나이 39살이었다. 자식을 키우려고 하지 않고 잘 자랄 수 있게 곁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 최선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아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믿어주는 것. 그것이 아이들을 행복한 어른으로 자라게 했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믿어주기만 했는데도 자식들이 모두 서울대에 간 데에는 유전적 요소나 가정환경도 무시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난 그녀의 태도와 마음가짐이 마음에 든다.


첫째, 자식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는 것

둘째, 자식이 아닌 자기의 성장을 위해 노력한 것


나도 그녀처럼 살고 싶다. 자식과 나의 삶을 분리하면서. 자식의 성장을 위해서가 아닌 나의 성장을 위해 살고 싶다. 그리고 성장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아이도 저절로 잘 자라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하지만 지금 나는 어떤가? 그렇게 살고 있을까? 라고 묻는다면 자신이 없다.


아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한다는 것은 엄마 자신의 막연한 불안감과의 싸움이다.


또래를 키우는 아이 엄마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이를 독립적으로 키워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세상에 워낙 사건사고가 많으니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거다.


올해 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엄마가 먼저 말을 꺼낸다.


"우리 아이 반에 엄마가 데리러 오지 않는 아이가 하나 있어. 우리 아이가 그 애랑 친하게 지내더니 이제는 자기도 혼자 집에 오고 싶다고 데리러 오지 말라더라고. 알겠다고는 했지만 걱정이 되더라. 그래서 하루는 아이 뒤를 쫓아가 봤는데 글쎄 친구가 준 돈으로 같이 뽑기를 하고 있더라고. 학원 갈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그 아이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같이 다니게 하려니 좀 걱정이 되더라고."


아이를 독립적으로 키우고 싶어 혼자 하원하도록 하고 용돈을 쥐어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엄마 입장에서는 '엄마가 신경 쓰지 않는 아이'로 보이는 거다.


또 다른 에피소드도 공감이 된다.


"아이가 5살 때인가. 어디 큰 쇼핑몰에 갔는데 아이가 남자 화장실에 혼자 가겠다고 떼를 쓰는 거야. 여자화장실에 같이 들어가자고 했더니 자기는 남자인데 왜 여자화장실에 가냐면서 혼자 가겠데. 거기 들어가면 내가 들어가 볼 수도 없고 너무 불안하더라고. 결국 아이를 설득시켜서 여자화장실로 데려갔지. 그랬더니 아이는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었어."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다섯 살이면 혼자서도 갈 수 있는 나이인데 엄마가 잘못했다는 사람, 무서운 세상에 어떻게 아이 혼자만 들여보낼 수 있냐는 사람, 아이 혼자 들여보내고 내가 볼일이나 제대로 볼 수 있겠냐 등등.


아이를 독립적으로 키우고 싶다는데는 동의하면서도 그 방법이나 시점에 대해서는 해결되지 않는 숙제가 남아 있다.




하굣길. 집을 향해 뛰어가는 아이 뒷모습을 바라본다. 어느새 아이는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불현듯 불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아이를 불러 세우지 않는다. 아이의 뜻대로 걸어갈 수 있게 둔다. 불안한 마음은 내 것이지 아이의 것이 아니기에.


엄마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알고 아이가 나를 찾는다면 마음껏 위로하고 안아줄 거다. 하지만 내가 먼저 '엄마랑 같이 가야지' 라며 말하지 않겠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아이를 자립심 있게 키우는 방법이다. 나의 불안과 아이의 불안을 분리할 줄 아는 것. 나의 불안을 아이에게 떠넘기지 않는 태도.


그럼에도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녀처럼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나가지 않을 자신은 없다. 고3 아들을 두고 훌쩍 해외로 떠날 용기도 없다. 다만 나와 아이는 다른 인격체임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살고 싶다. 그리하여 내가 나이를 먹었을 때,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 좋겠다. 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SNS를 통해 확인하고 때때로 좋아요를 눌러 응원하며 살고 싶다. 아이가 나를 찾아온다면 언제나 환영이지만 나를 찾지 않는다 해도 서운해하지 않고 나의 인생을 즐기며 살고 싶다.


나는 그렇게 나이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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