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이 Jul 25. 2022

아이라는 좋은 핑계

 아이는 좋은 핑계였다. 살림을 제대로 하지 않아도 운동을 하지 않아도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나가지 않아도 아이가 어릴 때는 다 용서가 됐다. 장난감으로 발 디딜 틈이 없는 집 안을 보고도 아이가 어릴 때는 다 그렇다며 위로해주는 사람이 더 많았다. 운동 부족으로 체력이 달려서 자주 병원에 갈 때마다 아이 어릴 때는 어쩔 수 없다며 힘내라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머리도 감지 못하고 며칠째 같은 옷을 입고 다녀도 아기띠를 메고 있으면 그럴 수 있지 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아이가 내 품을 벗어나 혼자 걷고 뛰면서부터는 아이 핑계를 대기가 무안해졌다. 둘째가 있었다면 그 아이를 방패 삼았을 텐데 외동아들을 키우는 나는 둘째 핑계를 댈 수가 없었다.


"아이가 예민해서 제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좋은 핑계였다. 자기 계발을 잠시 미루고 외모를 가꾸는 일도 멀리하고 싶었다. 지금 나의 상황과 처지를 직면할 자신이 없었다. 아이에게 헌신한 만큼 멀어진 나의 경력, 이전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시 시작할 용기가 없었다. 아이를 앞세워 계속 숨어있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계속 자라고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갑작스러운 이사로 유치원을 옮기게 된 올해 초. 하필이면 3월에 코로나에 걸리는 바람에 4월이 되어서야 뒤늦게 입학을 하게 되었다. 방과 후 활동까지 하면 하원 시간이 4시였는데 내 기준에서는 너무 늦은 하원 시간과 낯선 친구들과 하루를 보내야 할 아이가 걱정되었다. 원장님께 따로 아이가 원하면 일찍 하원을 시켜달라고 거듭 부탁을 드렸다. 아이에게도 여러 번 당부했다. 집에 오고 싶으면 선생님께 꼭 말씀을 드려야 한다고 연습도 시켰다. 아이가 첫 등원하던 날, 언제 하원하겠다는 연락이 올지 모르니 긴장되는 마음으로 휴대폰을 옆에 두고 기다렸다. 점심을 먹으려 상을 차리고 숟가락을 들었지만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아이에게서 연락이 올 것 같아 떨리는 마음으로 벌서듯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2시가 되고 3시, 4시가 되어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아이를 데리러 갔다. 하원하는 아이의 얼굴이 밝았다. 그런 아이를 보자 대견하고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내가 모르는 아이만의 사생활이 훨씬 더 많이 지겠구나라고 생각하니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이를 놓지 못한 것은 나였음을.


 다음 날 아침, 아이는 웃으며 유치원으로 향했다. 반갑게 손을 흔들고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곳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발걸음이 쉽게 돌아서 지지 않았다. 아쉬웠다. 아이가 다시 돌아와 나에게 안기며 엄마랑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해줄 것만 같다. 그럼 나도 못 이긴 척 ‘그럴 줄 알았어’하며 아이를 안고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울며불며 나를 붙잡고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울던 아이를 키우던 나. 아이는 이미 저만큼 앞서가고 있었는데 그때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가족이 모두 떠나고 널찍한 집에 혼자 남았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텔레비전을 켜자니 한번 보기 시작하면 의미 없이 시간만 보낼 것 같아 관두었다. 휴대폰을 뒤적여 누구에게 연락을 해볼까 망설이다 다시 내려놓았다.

     

 ‘나 이제 뭐 하지?’     


 그렇게 갱년기를 앓아도 어색하지 않을 나이에 뒤늦은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모든 아이는 자란다. 반드시. 조금 빠른 아이, 느린 아이 속도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계속해서 자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떠난다. 이것 또한 진리다. 물리적, 경제적 독립은 조금 늦을지 몰라도 정신적 독립은 부모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온다. 육아의 목표는 아이가 건강한 성인이 되어 떠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 조금씩 엄마의 역할을 줄이고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어쩌면 아이는 ‘내가, 내가’를 외치던 아기 때부터 엄마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정작 나 없이는 할 수 없다며 아이의 독립을 막는 것은 나였다. 미련이 잔뜩 남은 엄마를 두고 아이가 완벽히 독립할 수 있을 리 없다.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없다. 언젠가 우리가 필연적으로 헤어져야 하는 그날, 웃으며 아이를 보내주기 위해서라도 엄마도 엄마의 삶을 찾아야 한다. 엄마로서가 아니라 나로서도 바로 서야만 아이와 헤어질 수 있다. 아이가 자라고 성장하는 만큼 엄마도 성장해야 하는 이유다.


 워킹맘은 상대적으로 함께 성장하기 좋은 조건이다. 물리적으로 아이와 떨어져 있고,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립적으로 키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전업주부는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어느 날 아이의 뒤를 쫓아다니며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자. 지금 아이를 앞세워 핑계를 대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하는 것이 빠르다는 이유, 아이는 잘 모른다는 이유 혹은 막연한 모성애로 아이의 독립을 막고 나의 성장을 미루고 있지 않은지. 이제는 아이 뒤에 숨어 미뤄왔던 일들을 시작해야 할 때다.  꼭 돈을 버는 일이 아니어도 좋다. 거창한 일일 필요도 없다. 그저 내가 나로서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 꼭 해야 하는 일. 나를 돌보고 나를 아끼는 일. 아이 외에 나의 신경을 온전히 빼앗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아이에게 향했던 온 정신을 나의 기쁨을 위해 나의 만족을 위해서 나누어 써야 한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 우리는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챙기고 크고 작은 가정사를 챙긴 후 시간을 쪼개서 나를 위한 일에 투자를 해야 하는 만큼 짧은 시간 안에 성과를 내기도 어렵다. 때문에 포기하기 쉽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해야 한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적당히 뜨끈하게.


 다시 시작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거다. 막상 노트북을 켜고 앉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한 때는 매일 자연스럽게 들어가 구직정보를 찾고 배울 것들을 검색했겠지만 이제는 무엇을 검색해야 할지 조차 모를 수 있다. 그래도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무엇이라도 시도해봐야 한다. 도저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쌓여있는 메일함이라도 정리해보자. 그곳에는 지난날 내가 가입한 각종 사이트로부터 날아온 안부를 묻는 메일이 쌓여있을 거다. 그 메일을 정리하다 보면 '맞아. 내가 이런 일에도 관심이 있었지.' 하는 메일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렇게 천천히 뇌를 깨우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시 시작해보자. 꺼졌던 불씨가 다시 타오를 때까지.



* 사진출처 :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아플 때 달려와 줄 사람은 누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