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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Jul 31. 2022

연락을 끊었던 친구와 화해했다.

A는 오랜 친구이자 나의 롤모델이었다. 나에게 가장 많은 자극을 주는 친구였다.

고등학교 때는 방학마다 해외 어학연수를 다녔고, 대학에 입학해서는 여러 남자 친구를 만나고 다녔다. 졸업 즈음 석사학위를 받는다며 영국으로 홀연히 떠난 그녀를 따라 유학길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유럽여행을 떠났다. 그녀가 없었다면 내 평생 에든버러 페스티벌은 동경의 대상일 뿐이었을 거다. 취직한 이후에도 우리는 사회초년생의 피로를 이야기하며 자주 만났다. 공통분모는 딱히 없었지만 함께 만나면 편했고 어떤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사이였다.


그런 그녀가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은 내가 전업주부가 된 후였다.


나는 그녀보다 1년 먼저 아이를 낳았고 퇴사를 하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돌이 지난 아이를 안고 여전히 쩔쩔매던 나. 육아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쓸 수 없었던 나와 달리 그녀는 갓난쟁이에게 수면교육을 성공해 분리 수면을 하고 있었고 남편의 석사학위를 위해 해외로 떠날 준비도 하고 있었다. 혼자서 쌔근쌔근 자고 있는 그녀의 갓난쟁이 아들과 똑부러지는 육아방식을 보고는 마음이 시끄러웠다. 나는 일부러 그녀와의 연락을 피했다. 서로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없던 시기였으므로 친구는 내가 일부러 연락을 피했다는걸 눈치채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확실히 의도적으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그녀는 온 가족이 함께 남편의 유학을 위해 해외로 떠났고 해외 체류 중 둘째를 가졌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 한국에 들어와 둘째를 낳고 몸조리를 한 후 다시 해외로 돌아갔다. 그녀의 소식은 다른 친구를 통해 간간히 들었지만 이제와 솔직히 말하건대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지 못했다. 부끄럽게도 그때의 나는 그녀의 삶이 부러워 배가 아파 견딜 수 없었다. 그건 그만큼 내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런 그녀와 7년 만에 다시 만났다.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이들을 데리고 공연을 보러 갔다. 내친김에 아빠들은 빼고 아이들과 캠핑도 다녀왔다.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우리였기에 아이들과 놀아주고 녹초가 되어 침묵할 때도 어색하지가 않았다. 편했다.


옛날 생각이 났다. 20살. 한없이 빛나고 찬란했던 시절.

우리는 맛집을 찾아 함께 다녔고, 홍콩이나 일본에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언어의 공연을 함께 보곤 했다. 3박 4일 폭우를 뚫고 자전거 일주를 마친 것도 지금의 친구와 함께였다.


친구의 둘째 아이가 서툴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자신의 엄마 이름을 부르던 순간. 난 그 익숙한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 입을 통해 수없이 부르던 그녀의 이름은 아이가 부르는 그 이름과 같지만 다른 느낌이었다. 과거 그녀를 부러워하며 행복을 빌지 못하던 부끄러운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고 동시대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동질감이 느껴졌다.


내가 부러워하던 친구 역시 여느 부모와 다름없는 엄마였다. 아이가 남긴 밥을 긁어먹으며 대충 끼니를 때우는데 익숙했고, 보약이 없으면 체력이 달린다며 여행지에 와서도 때마다 보약을 챙겨 먹었고, 10시도 되지 않은 시간에 아이를 재우다 스르륵 잠이 드는 평범한 부모.


"친구야, 우리 아이들이랑 이렇게 자주 만나서 놀자. 너무 좋다."


이 말 안에는 그동안 미안했다는 말, 고맙다는 말 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여전히 행복하다는 말이 담겨있었다는 걸 친구는 알지 모르겠다. 이제라도 다시 친구를 받아들일 있어서 다행이다. 아마 지금 내 삶에 만족하게 되었다는 반증이겠지.


우리는 시원한 바람이 불 때쯤 아이들만 데리고 함께 놀이공원에 가기로 했다.

둘이 함께 하던 추억을 이제는 다섯이 함께 하게 되겠지.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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