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 8년 차. 나는 자발적 전업주부다. 어딘가로 출근하는 삶은 살지 않기로 결심했으니 경력단절 여성이란 말보다는 자발적 전업주부라는 말이 적절하다. 특목고 출신, 서울 4년제 대학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인턴십과 해외연수 등을 거쳐 멀쩡하게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방에 근무하는 남편을 만나 결혼과 출산을 하며 내 인생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혼 2년 차, 소중한 첫째 아들이 찾아왔다. 뱃속에서부터 효자였던 아들 덕분에 흔한 임산부의 입덧조차 없었던 나는 인생 최고의 컨디션으로 만삭 때까지 출근했다. 만원 버스를 타고 출장, 주말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출산휴가를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아이는 당연히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워킹맘으로 살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우리 아이는 까다로운 아이였다. 오로지 엄마만 찾는 낯가림의 끝판왕, 엄마 껌딱지의 결정체. 출산휴가가 끝날 때쯤 육아휴직을 추가로 더 내고 1년을 쉬었다. '돌이 되면 좀 나아지겠지'라는 생각과는 달리 아들은 더욱 엄마에게 집착했다. 믿을 것은 오직 친정엄마.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다시 직장으로 복귀했다.
전업주부가 되는 건 운명이었을까? 출근 3일 만에 엄마가 다쳤다. 평소에도 무릎 관절이 안 좋았는데 마트 주차장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진 것이 화근이었다. 병원에서는 당장 수술을 권했고 그런 엄마에게 아이를 맡길 수는 없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내기는 어려운 처지였고, 시댁에서도 아이를 봐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방법은 딱 하나. 내가 회사를 그만두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전업주부가 되었다.
"내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를 유심히 관찰해보면 누군가가 나를 대했던 그 태도로 아이를 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 박우란
친정엄마 핑계를 대긴 했지만 내가 전업주부가 되기로 한 것은 온전히 내 선택이었다. 워킹맘으로 살아갈 의지가 충분했다면 아이를 돌봐줄 도우미를 쓰거나 더 일찍 기관에 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전업주부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 이유는 세 가지.
첫째, 섬세하고 따뜻한 전업주부 엄마 밑에서 자란 나, 내가 받은 만큼 아이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둘째, 내가 아니면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회사 일, 막상 쉬어보니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셋째, 아이의 가장 예쁜 시기를 함께 보내고 싶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자발적으로 전업주부가 되었다.
시간은 흐르고, 고된 코로나의 시간도 흘러 어느덧 아이는 유치원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할까 봐 안절부절못했지만 아이는 빠르게 유치원 생활에 적응했다. 입학한 지 한 달이 지나자 스스로 친구들과 더 놀고 싶다며 방과 후 활동까지 신청했다. 속으로 내심 서운했다. 아이를 붙잡고 놓지 못한 것은 나였다. 엄마 껌딱지. 아이는 그 시절에서 한 뼘 자랐지만 나는 그 때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해. 아이가 자란 만큼 나도 성장해야지. 이렇게 아이만 바라보며 살 수는 없어........'
그날부터 계획표를 짜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적어나가며 하나씩 실천했다. 여기서는 아이를 어느 정도 키워놓은 후 살림도 육아도 자기 계발도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어 허우적대던 시절부터 모두 다 잘 할 수 없다면 살림은 조금 내려놓기로 결심한 이야기를 담았다. 그렇게 스스로 타협한 '살림 미니멀'의 노하우를 적었다.
전업주부지만 살림은 귀찮고 하기 싫은 사람. 매일 꾸준히 하되 살림은 적당히 하며 남은 체력과 시간에 글을 쓰고, 발레를 하며 자기계발에 투자하는 살림이 귀찮은 전업주부의 본격 살림에세이를 시작한다.
발레하고 글쓰는 자발적 전업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