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어떻게 되세요?"
"전업주부인데요."
"그럼 소득을 증명할 만한 서류가 필요한데요........."
백화점 신용카드를 만드려다가 포기했다. 직장인이라면 재직증명서나 월급명세서 같은 서류로 금방 끝냈을 일이다. 하지만 전업주부인 내가 하려니 서류가 복잡하다. 신용카드 없이도 사는데는 지장없으니까 됐다.
전업주부. 다른 일에 종사하지 않고 살림을 전문으로 하는 주부.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와있는 정의다. 다른 일에 종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살림을 전문으로 한다기에는 부족한 수준이다. 이 정의대로라면 가족이 없는 시간에는 밀린 설거지, 빨래, 청소를 하고 식사 준비를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전업주부라고 하면 종종 쓸모없는 질문을 받는다.
"집에서 뭐하세요?"
비슷한 류의 말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너는 집에서 쉬니까 좋겠다."
"나도 너처럼 전업주부로 살고 싶다. 살림만 하면서."
이런 말은 언제, 누구에게 들어도 기분이 나쁘다. 그들 생각처럼 집에서 할 일 없이 놀고 있거나 살림만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도 많이 컸는데 엄마도 자격증을 따든 아르바이트를 하든 일자리를 구하라는 조언도 많이 듣는다. 반대로 취집(취직 대신 시집)을 한 거냐며 재력과 능력을 갖춘 남자와 결혼해서 돈 걱정 없이 사는 걸로 여기는 사람도 종종 있다.
육아, 살림, 자기계발 어느 것 하나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강박은 여기에서 시작됐다. 전업주부로서의 자존감 때문이다.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지만 내 명의의 신용카드 하나 마음대로 발급할 수 없고, 직업란에 쓸 말이 없는 전업주부가 당당하기란 쉽지 않다. 매달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는 아들을 두고 학원비를 계산하거나 아이 학원비를 위해 내 취미활동을 망성여야 하는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한없이 작아진다. 그런 외부상황들이 전업주부 스스로를 작아지게 만든다.
'돈은 못 벌어도 살림은 야무지게 해야지.'
'학원도 못 보내니 내가라도 남들 못지 않게 가르쳐야지.'
'전업주부라고 아줌마처럼 보이면 안되는데.......'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낮아지는 자존감, 다른 또래 여자들과의 끝없는 비교. 전업주부의 늪이다.
나도 그랬다. 아이를 유치원에 맡기고 온종일 집에 있을 때면 육아, 살림, 자기계발 어느 것 하나 뒤쳐지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스트레스가 되어 극심한 편두통으로 찾아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두통, 더 이상 진통제도 듣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신경외과를 찾아갔다. 선생님은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는 흔한 말을 하며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조언했다.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상황을 설명하자 친구는 명쾌하게 말했다.
"좀 내려놔."
집으로 돌아와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누웠다. 머릿 속으로 밀린 빨래 걱정, 청소 생각, 저녁 먹거리를 고민하는 나를 보며 깨달았다. 살림을 줄여야겠다. 살림 대신 나를 좀 돌봐야겠다.
맞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다. 인정하자. 나는 슈퍼우먼이 아니다. 살림따위와는 적성이 맞지 않는 사람이다. 전업주부지만 살림을 전문으로 해서 자존감을 높이기도 힘든 타입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일을 시작할텐가? 그럴 수도 없다. 저질체력으로 일을 해봐야 약값이 더 나올테고, 아이를 잠깐이라도 돌봐 줄 친정도 멀고, 남편도 일하는 나를 위해 살림을 거들만큼 자상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지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 기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시작하자.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시간 확보가 중요했다. 어른의 삶이란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기에는 해야만 하는 의무가 넘친다. 살림. 귀찮고 하기 싫지만 전업주부인 내가 꼭 해야만 하는 그 일을 먼저 해결해야했다. 살림 미니멀은 이렇게 생존을 위해 시작됐다.
* 사진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