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의 햇살> 2024년 4월호 #채링크로스 84번지
아주 오래 전, ‘펜팔(pen-pal)’을 한 적이 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일상을 나누는 것 말이다. 내가 어릴 때는 대중가요가 실린 책 부록에 펜팔을 원하는 사람들의 명단이 있었다. 이름 옆에는 주소와 취미가 적혀 있었는데, 이를 살펴보면서 펜팔을 할 대상을 찾아 편지를 주고받았다. 요즘 청소년들이 앱을 이용해서 외국에 있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듯이 그렇게.
기억너머 저편에 있는 추억이 떠오른 것은 오늘 소개할 책이 『체링크로스 84번지』 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미국과 영국에 있는 두 사람, 아니 미국에 있는 한 사람과 영국에 있는 여러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책이다. 편지는 1949년 10월 5일에 시작된다. 뉴욕에 살고 있는 한 작가가 ‘토요문학평론지’에 실린 광고를 보고 영국에 있는 중고서점으로 편지를 보낸다. 자신은 희귀 고서적에 취미가 있는 가난한 작가이며, 절박하게 구하는 책들의 목록을 동봉하니 한 권당 5달러가 넘지 않는 중고책으로 구해달라는 주문 편지였다. 20일 뒤, 영국의 서점에서 답신을 보낸다. 요청받은 목록 가운데 3분의 2를 해결했으며, 당신이 원하는 책과 같은 것은 없지만 다른 버전의 책이 있다며 구매를 할 것인가를 묻는다.
이 편지를 시작으로 마크스서점의 직원과 가난한 작가 헬레인 한프의 편지는 계속 이어진다. 헬레인은 원하는 책 목록을 보내고, 서점의 직원인 프랭크는 책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편지에는 요청사항과 처리사항만 적히지 않는다. 어느 시점부터 우정이 적히기 시작한다. 당시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영국의 사정이 좋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헬레인이 책을 주문하며 서점 직원들에게 식료품을 소포로 보낸다. 크리스마스에는 햄을, 부활절에는 통조림과 달걀을 보내며 책을 구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그러자 그동안 등장하지 않았던 서점 직원들이 직접 헬레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편지를 주고받는 프랭크 뿐 만 아니라 자기들도 헬레인의 책을 구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살며시 자신들의 주소를 알려준다. 필요한 게 있으면 개인적으로 따로 연락하라는 의미였다. 이를 기점으로 헬레인과 서점 직원들과의 우정이 확장된다.
주문서로 시작된 편지는 책 속의 내용을 공유하는 독서 토론 편지나, 가족들의 안위를 묻는 안부편지가 된다. 그렇게 20년 동안 이들의 편지는 지속된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는 동안 미국과 영국을 오고간 편지가 멈춘 것은 1969년 가을이다. 헬레인과 처음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던 프랭크가 세상을 떠나고, 마스크 서점이 문을 닫으면서 이들의 왕복편지가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우정은 끝나지 않았다. 이들의 편지가 『체링크로스 84번지』 로 출간되어 영원히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작가와 서점 직원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읽다보면, 마치 내가 수신인처럼 느껴진다. 헬레인이 나에게 책을 주문하고, 서점직원들이 내게 마음을 전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편지만으로 우정을 만들고,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으로 대하는 것을 보면서, ‘편지는 나를 대신해서 가는 나’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혹시 오랫동안 소원했던 사람이 있다면, 너무 멀리 있어서 소식을 전하기가 쉽지 않았던 사람이 있다면 편지 한 통 써 보는 건 어떨까. 편지 쓰기가 너무 어렵다면 문자나 카톡이나 DM을 보내도 좋겠다. 그것이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내가 쓰는 한 문장이 ‘나를 대신해서 가고 있다’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