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과 정난주의 아들, 황경한을 생각하며 쓰는 편지
나의 이름은 황경한이외다. 한 평생을 제주가 보이는 추자에서 살았지만, 나의 뿌리는 육지에서 시작되었다고 들었소. 나를 키워준 양부모의 말에 따르면 나는 천주학을 믿던 황사영이라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오.
아버지는 열여섯 살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될 만큼 큰 인재였지만, 나이가 어려서 조정의 일은 하지 못했다고 하오. 이를 안타깝게 여겼던 정조임금이 아버지를 격려하고 스무 살이 되면 꼭 조정으로 돌아오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소. 아버지는 마재에 살던 정씨 집안의 여인과 혼인을 하였소. 내 어머니의 이름은 정난주로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의 조카였소. 어머니는 정약용의 큰 형인 정약현의 딸이었던 것이오.
내가 두 살이 되던 해, 조선에서는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소. 천주교를 믿는 교우들을 색출해 배교를 종용하고, 배교하지 않으면 처형을 하는 사건들이 있었던 게요. 중국인 신부 주문모와 여러 신자들이 잡혔고, 천주학을 믿던 아버지는 박해를 피해 배론으로 숨어 들었소. 어머니와 할머니는 어린 나를 안고 마재로 돌아와 있었고, 배론에 숨어있던 아버지는 박해받고 있는 천주교인들의 실상을 알리려고 편지를 썼소. 길이 62cm, 너비 38cm의 하얀 비단에 1만 3311자를 넣은 만지장서를 써서 북경으로 보내려고 했던 것이오. 그러나 이 편지는 북경으로 건너가기 전에 조선에서 발각되었소. 아버지는 서양의 힘을 빌려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려 했다는 죄목으로 능지처참 당했고, 우리는 유배길에 올라야 했소. 할머니는 거제도로 귀양가시고, 어머니와 나는 제주로 유배를 당했소. 그러나 어머니는 어린 내가 관의 노비가 되어 자라는 것을 볼 수가 없어, 추자도에 나를 내려놓고 홀로 귀양을 갔다고 하오. 해안 바위에서 울던 나는 오씨 성을 가진 어부에게 발견되어, 그 집안에서 자라게 되었소. 당시 내가 입고 있던 베냇 저고리에 나의 이름과 부모의 이름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옷은 집안에 화재가 났을 때 소실되었소.
나는 어느 정도 철이 들었을 때, 내 부모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소. 어머니가 지척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찾아가 문안을 여쭐 수가 없었소. 제주에서 사람들이 올 때 그들에게 어머니의 소식을 물어 전해 들었을 뿐, 어머니를 만날 수가 없었소.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바다에 나가 제주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어머니의 건강을 비는 수밖에 없었다오.
오늘 글을 읽다가 ‘만지장서 (滿紙長書)’라는 사자성어를 보니, 옛일들이 떠오르는구려. ‘사연을 많이 적은 편지’라는 뜻을 가진 만지장서. 아버지가 1만 3311자의 편지를 쓰지 않았다면, 육지에서 부모님과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는지... 뒤 늦은 상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만, 그랬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았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에 찬 바람이 지나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