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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큐레이터 Aug 06. 2020

르네마그리트의 편지


반갑네 윤선생. 나는 르네마그리트네. 당신이 ‘마스크’라는 소재로 글을 쓰려고 검색했던 그 화가말일세. 사실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웠네. ‘마스크’라는 소재로 글을 쓴다면서 왜 내 이름을 검색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네. 그런데 자네가 내 그림 ‘연인들’을 클릭하는 걸 보고서야 이해했네. 천을 둘러쓰고 키스를 하고 있는 연인들의 그림이 당신에게는 마스크를 연상시켰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코로나19가 세상을 덮친 후,  결혼식장에 마스크를 쓰고 등장하는 신랑 신부들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네. 필리핀에서는 수백쌍이 합동결혼식을 하면서 신랑 신부는 물론 하객들까지도 모두 마스크를 착용했다고 하더군. 결혼식이 끝난 뒤, 마스크를 쓰고 키스를 나누는 신랑 신부의 사진이 대서특필 되면서 내 그림이 회자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그 때문에 자네도 ‘마스크’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내 이름을 검색했던 것이지.     


내가 무슨 선견지명이 있어서 그런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라네. 내가 그 그림을 그린 건 1928년이었네. 몇 해 전에 스페인 독감이 퍼져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 그러나 내가 천을 둘러쓴 연인들을 그린 건 그것과 상관이 없었네. 그 지독한 바이러스가 천을 뒤집어 쓴다고해서 차단되는 건 아니니까. 


그림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들은 그 그림에 내 정신세계를 투영하더군. 우리 어머니가 물에 빠져 자살했던 사건과 연결해서 말이야. 자네도 알고 있듯이 우리 어머니는 스스로 세상을 등졌네. 흐르는 물속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가 삶을 마쳤지. 며칠 후, 나는 강에서 끌어 올리는 어머니의 시신을 보았네. 어머니가 입고 있던 치맛자락이 얼굴을 덮고 있었지. 그 장면은 아주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연인들의 얼굴에 천을 뒤집어 씌운건 아니라네. 그 장면과는 상관이 없어. 내가 <연인들>을 발표했을 때도 많은 학자들이 내놓은 추측성 보도에 내가 아니라고 반박을 했지만, 그들은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네. 자네도 인터넷에 떠도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내 어머니의 죽음과 그 그림을 연결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네.      


나는 ‘얼굴이 없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네. 겉모습이 아닌 사람의 존재, 그것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걸세.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질 때 가장 먼저 ‘얼굴’에 호감을 느끼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외모’라고 하더군. 얼마 전에 한국에서 조사한 결과를 나도 보았네. 그건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닐걸세. 내가 태어나고 자란 벨기에에서도 아마 비슷한 결과가 나올 걸세. 내가 살았던 시대에도 외모는 중요했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는 외모가 중요했지. 그래서 나는 그걸 가려보고 싶었네. 외모를 제외하고도 사랑을 느끼는 것이 가능할까? 그럴 수는 없을까? 그런 것을 생각했던 것이네.     


이쯤에서 자네는 궁금해질 것일세. 내가 그린 <연인들>속에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모르는 상태인지, 아는 상태인지 말일세. 글쎄. 그건 나도 알 수가 없네. 그림을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될 테니까. 그 둘은 서로의 얼굴을 아는 사이일 수도 있고, 모르는 사이일 수도 있네. 서로의 얼굴을 모르고 있다면, 그들은 내 의도대로 ‘한 사람의 존재’ 그 자체에서 사랑을 느끼고 있을테고, 아는 사이라면 글쎄. 천 조각 따위로 얼굴을 가린다고 해도 우리의 사랑은 막을 수 없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까? 지난 글쓰기 시간에 마스크가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고 쓴 자네와 다른 생각이지. 나는 사랑하는 연인들이 마스크를 착용한다고 해서 사랑이 약해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네. 어쩌면 더 간절해질지도 모르지. 천을 둘러쓰고 키스를 나누고 있는 내 그림 속의 연인들처럼 말일세.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어떤 예술작품이라 해도 작가가 완성을 하면 그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것이네. 작가가 어떤 의도로 작품을 만들었던 정답은 작품을 보는 사람이 갖게 되는 것이지. 작품을 보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 생각하는 해석이 정답이 되는 것일세. 내가 아무리 <연인들>의 그림이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이 없다고 말해도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 사건과 연결 짓는다면, <연인들>은 내 트라우마에서 탄생한 작품이 되는 것이고, 21세기에 지구를 뒤덮을 코로나19라는 감염병을 예상하고 ‘마스크를 쓴 연인들’을 그렸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정답이 되는 걸세. 내 그림을 어떻게 해석하든 이제 와서 내가 무어라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일 걸세.     


자네는 내 그림을 어떻게 보았는지 궁금하군. 혹시 시간이 된다면 내 편지에 답장을 좀 써주겠나? 1900년대의 그림을 2020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는지 알고 싶다네. 하루하루 무료하게 살고 있는 늙은이에게 소소한 즐거움을 선물해주길 기다리고 있겠네.      



2020년 6월 1일 

르네마그리트


르네마그리트 <연인들>, 1928,  소장처:뉴욕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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