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덕과 권정생의 편지
얼마 전, 휴대폰으로 사진 한 장이 도착했습니다. 손글씨가 가득 담긴 엽서와 오래된 우표가 붙은 낡은 편지봉투였지요. 무슨 편지들일까 궁금해 사진을 확대해보니, 1990년대에 제가 친구에게 보냈던 편지였습니다. 이사를 가려고 짐을 정리하던 친구가 편지함에 있던 저의 편지들을 찍어서 보내준 것이지요. 사진 속에는 알록달록한 컬러 봉투도 있었고 제가 다니던 회사의 로고가 찍힌 봉투와 엽서 한 면을 깨알 같은 글씨로 채운 편지도 있었어요.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성탄카드였습니다. 도화지 위에 한지를 찢어서 만든 ‘수제 카드’였지요.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로 시작되는 카드에는 친구의 건강과 행복을 바라는 메시지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20년도 훨씬 전에 썼던 성탄 카드를 보다가 문득 편지 한 통이 떠올랐습니다. 동화작가 권정생이 작가 이오덕에게 보낸 연하장이였어요.
1974년 12월 26일, 권정생은 이오덕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냅니다. 작은 엽서에 직접 그린 그림과 짧은 글을 쓴 연하장이였지요. 한 번만 봐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편지의 그림은 이렇습니다. 종이 한 가운데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고, 그 뒤에는 두 개의 산봉우리가 보입니다. 왼쪽에 있는 산에는 겨울나무 한 그루가, 오른쪽에 있는 산에는 새해를 밝히는 해가 걸려있지요.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고요히,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 아래쪽에는 ‘새해에는 절대 아프지 말아주세요.’라는 짧은 글이 있습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깊은 마음이 느껴지는 편지였지요. 이오덕의 건강을 권정생이 얼마나 바라고 바랐는지 단 번에 알 수 있는 편지였습니다.
평생 동안 깊은 우정을 이어간 두 사람의 편지가 시작된 것은 1973년입니다. 신춘문예 동화 부분에 당선된 권정생의 글을 읽고 이오덕이 그를 찾아가면서 만남이 시작되었지요. 이오덕은 권정생을 만나기 위해 안동군 일직면 조탑동에 있는 일직교회를 찾아갑니다. 권정생이 일직교회의 종지기로 문간방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락도 없이 찾아온 이오덕을 권정생은 기꺼운 마음으로 반겼습니다. 권정생 또한 이오덕의 시를 읽으며 그를 한 번 만나보려고 편지를 쓴 적이 있었거든요. 편지를 보내지 못했었지만, 이오덕을 향한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교회 문간방에서 마주앉은 두 사람은 동화와 동시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며 긴 밤을 보냈습니다. 이오덕이 다녀가고 며칠 후, 권정생은 이오덕에게 편지를 씁니다. 일평생 처음으로 마음 놓고 삶에 대한 투정을 해보았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지요. 그리고 따뜻했던 첫 만남에 대한 소회를 적고, 부탁한 원고는 조금 더 기다려달라고 청합니다. 이오덕은 더 많은 사람들이 권정생의 동화를 읽게 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권정생에게 써 놓은 동화가 있으면 보내달라고 했던 것인데, 사정이 생겨 정리를 마치지 못한 권정생이 양해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이 편지를 시작으로 2002년까지, 29년 동안 두 사람의 편지가 이어집니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스승과 제자처럼, 때로는 동지처럼 두 사람은 펜을 꾹꾹 눌러 마음을 주고받습니다.
그들의 편지에는 권정생의 삶을 살뜰히 챙기려고 노력하는 이오덕과 그런 이오덕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간 권정생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오덕은 권정생의 글을 하나라도 더 출판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고,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출판사를 알아봅니다. 멀리 있는 권정생을 대신해 원고료를 받아주고, 때때로 권정생에게 생활비를 건네기도 하지요. 권정생은 원고지 천 장을 사와 죽기 전에 써야 할 것을 어서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이야기를 꼭 세상에 써서 남겨 놓고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계속 글을 씁니다. 자신이 듣고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말이에요. 두 사람의 삶은 편지지 위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이오덕은 상경하는 기차 안에서도, 수업하던 학교 교실에서도, 우편물을 보내러 간 우체국에서도 권정생에게 편지를 씁니다. 권정생은 글을 쓰다가도, 지병으로 인한 통증의 고통 속에 있을 때도 이오덕에게 편지를 쓰지요. 권정생의 아름다운 글이 어떤 고통 속에서 나왔는지, 이오덕이 권정생의 글을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으로 아꼈는지 그들이 남긴 편지에 그대로 새겨져있습니다.
두 사람의 편지를 읽다보면 자주 눈물이 쏟아집니다. 약하고 여린 것들에게 연민을 품고, 하늘 아래 있는 모든 생명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심(詩心)이 꽁꽁 얼어있던 제 마음을 녹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더 갖고 싶어 욕심 부리는 나와 노력하지 않고 단 번에 성공하기를 바라는 내가 무너집니다. 번잡함에 치여 꽃이 피고 계절이 가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불쌍한 나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절망하는 내가 그들의 편지를 읽으며 다시 일어설 힘을 얻습니다. 이오덕과 권정생은 말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자연을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랑하라고요. 어린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린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라고. 그리고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함께 걸어갈 친구’가 되라고 말입니다.
1974년 12월 26일, 권정생이 이오덕에게 보낸 연하장을 다시 꺼내어 봅니다. 그리고 그 편지의 그림처럼 무릎 꿇고 앉아서 기도해주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립니다. 지난 한해 내 곁에 있어준 고마운 친구들, 나를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았던 가족들, 나와 함께 기쁘게 새해를 열어갈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와 편지지 위에 적어봅니다. 지난 한해도 잘 살아왔다고, 새해에도 아프지 말고 빛나는 삶을 살아보자고요. 이오덕과 권정생의 편지가 제 마음에 따뜻하게 남아 있듯, 저의 편지도 누군가의 가슴에 온기로 남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성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8년 겨울호에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