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저의 미술관은 ‘미술교과서’였습니다. 교과서에 실린 그림을 보는 것이 미술관람의 전부였지요. 화가나 그림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교과서 속에 있는 그림들을 보며 감탄하곤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렬했던 그림은 두 마리의 소가 머리를 맞대고 싸우는 그림이었습니다. 얼마나 생생하던지, 머리를 받친 소가 종이를 뚫고 나올 것 같아 신기해했지요. 그때 ‘이중섭’이라는 이름을 처음 만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천재’라고 불리는 화가, 소를 그리기 위해 하루 종일 소를 관찰하고 때로는 소도둑으로 몰리기도 했다는 그를 말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몰랐습니다. 소를 그리던 그의 손끝에서 수많은 편지가 탄생했다는 것을요.
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났습니다. 해방을 맞이하던 1945년, 원산에서 일본인 마사코와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됩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해서 1952년에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오지요. 부산을 거쳐 그가 정착한 곳은 제주도였습니다. 그는 서귀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초가에서 가족과 함께 삶을 꾸려가게 됩니다. 어른 한 명이 누우면 꽉 찰 것 같은 단 칸 방에서 가족과 함께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지요. 그러나 가난한 살림살이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부산으로 거처를 옮겨 가족들을 부양하려고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냅니다. 그 때부터 이중섭의 고독한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시작되었지요.
이중섭은 돈을 벌기 위해 삽화를 그리고, 전시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면서도 꾸준히 가족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가‘남덕’이라고 이름 지어준 아내와 태현과 태성, 두 아들에게 곧 만나게 될 거라고 안심시키지요. 그러나 한국에 남은 이중섭의 삶은 무척 고단했습니다. ‘하루에 한 번 우동과 간장만으로’식사를 하는 날이 많았고, 운이 좋아야 두 끼를 먹을 수 있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열심히 그림을 그립니다. 전시회를 열어 성공하면 자신도 일본으로 건너가 가족 곁에 머물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이중섭의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전시회에 출품했던 작품이 검열에 걸려 철수되었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끝자락에 앉아 있던 이중섭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1953년 7월에 일본에서 가족을 만납니다. 고작 일주일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이중섭에게 다시 그림을 그려야할 이유를 알려주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밤낮없이 그림에 몰두합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어서 곧 일본으로 가겠다’는 편지를 계속 보내지요. 그가 가족들에게 쓴 편지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편지도 그 무렵에 쓴 편지입니다. 하얀 종이에 잉크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색연필로 채색한 편지이지요. 이중섭은 이 편지에서 ‘머리도 맑아지고, 눈은 더욱 초롱초롱해져서 번득이는 머리와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림을 계속해서 그리고 표현하고 또 표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사랑하는 남덕을 행복한 천사로 만들어 세상에서 돋보이게 하겠다고 다짐하지요. 글씨 옆에는 가족을 그리고 있는 이중섭과 그가 그린 작품들, 가족들에게 받았을 편지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중섭이 얼마나 들뜨고 설레는 맘으로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을지 알 수 있는 편지입니다.
이중섭은 하루 빨리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전시를 합니다. 그러나 그림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해 좌절하지요. 친구들은 이중섭을 독려하고,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대구로 내려가 전시회를 준비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구상 시인에게 편지를 씁니다. 가톨릭 신자가 되고 싶다는 편지였습니다. 이중섭은‘하느님을 믿으려고 결심’했다며, ‘구형의 지도를 구해 가톨릭교회에 나가 모든 잘못을 씻고 예수 그리스도님의 성경을 배워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구해 매일 읽고 싶다’며 다음날 구상 시인을 만나러 가겠다고 약속하지요. 이중섭은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하느님께 기대어, 자꾸만 좌절되는 삶을 그 분께서 잡아주시기를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든든한 친구였던 구상 시인을 보며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결심했는지도 모르고요.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서 예수를 느꼈다고 고백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구상에게 편지를 쓰고 한 달 여쯤 뒤, 이중섭은 대구 미국문화원에서 전시회를 열지만 그림은 거의 팔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지요. 치료를 받은 이중섭은 왜관에 있는 구상 시인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그 곳에서 <구상네 가족>과 <성당 부근>이라는 그림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1955년 8월, 왜관을 떠나 서울로 향한 이중섭은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는 일을 거듭하며 고통스런 날들을 보냅니다. 그러다 그해 11월, 서울에 있는 성베드로정신병원에서 일본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쓰지요. 1주일만 있으면 퇴원한다고, 그러니 안심하라고 말입니다. 이중섭은 아내에게‘건강한 모습으로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며 자신이 도쿄로 가는 것은 힘들 것 같으니 남덕과 아이들이 서울로 오는 방법을 생각해보자고 합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가 되고 맙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이중섭이 1956년 9월 6일, 숨을 거두기 때문이지요. 그의 유해 일부가 구상 시인의 품에 안겨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아내 남덕이 그의 유해를 집의 뜰에 모시면서 이중섭은 그토록 바라던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불운했던 삶과 <싸우는 소>처럼 싸우고 또 싸웠던 이중섭. 그에게 가족은 살아갈 이유였고, 자신이 믿고 의지할 종교였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잃고 살았던 아버지 이중섭, 남편 이중섭. 그리움을 그린 그의 편지를 읽으며 많은 날들을 떨어져 살아야 했던 그와 가족들을 위해 두 손을 모아봅니다.
성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9년 봄호에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