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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큐레이터 Feb 21. 2019

아버지의 이름으로 편지를 썼던
정약용, 당신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고


당신이 살던 동네에 다녀왔습니다. 당신이 나고 자라고, 노년의 삶을 보냈던 동네말입니다. 당신은 그곳을 ‘마재’나 ‘두릉’이라고 불렀지만, 요즘 사람들은 ‘능내’라고 부릅니다. 조선의 문신이었던 한확의 묘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당신이 살던 동네는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이름 뿐 만 아니라 동네의 모습도, 그곳에 사는 사람도 모두 달라졌지요. 당신이 살던 집도 그때 모습이 아니고, 당신이 걷던 길도, 바라봤던 강도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도 저는 그곳에서 당신의 숨결을 느낍니다. 당신이 걸었을 길을 걷고, 당신이 바라봤을 강과 산을 바라보며 잠시 당신의 마음이 되어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그곳에서 당신의 편지를 받아 읽었을 학연과 학유를요.      


다산이 살았던 동네 마재(능내)에 흐르는 강


당신이 누군가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농아광지>라는 묘지명 때문이었습니다. 막내아들 농아가 마마에 걸려 죽었다는 소식을 받고 당신이 쓴 편지말입니다. 그때서야 당신에게 6남 3녀의 아이가 있었고, 그 중에 여섯 명이 당신을 앞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내가 알던 조선 최고의 지식인, 만능엔지니어, 동부승지 다산이 ‘아버지 정약용’이 되어 제게 말을 걸어온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편지를, 두릉에 남아 있던 아이들에게 쓴 편지를 찾아 읽었습니다. 참척의 고통을 여러 번 겪은 당신이었기에, 더 절절한 마음으로 썼을 편지를 말입니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1801년, 당신이 하담에서 쓴 편지로 시작되었습니다. 신유년 3월, 당신이 장기로 유배를 가던 길에 선영인 하담에 들러서 쓴 편지였지요. 천주학을 가까이 했다는 이유로 19일 동안 감옥에 갇혔던 당신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장기로 향합니다. 그러던 중에 하담에 닿아 부모님의 묘 앞에 큰 절을 올리고, 그날 밤, 두 아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귀양을 보내도 아버님 묘소가 있는 곳을 지나게 해주시니 임금께 감사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곳에서 편지를 쓴 이유는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욱신 거리는 어깨에 힘을 주어 기필코 편지를 썼던 이유는 당신의 아내 때문이었습니다. 지아비를 잃고 황망해 할 아내, 어린 자녀들을 홀로 돌봐야 하는 애처로운 아내를 두 아들에게 부탁하기 위함이었지요.  당신은 두 아들에게 당부합니다. ‘떠나올 때 보니 너희 어머니 얼굴이 몹시 안됐더라’고. ‘늘 잊지 말고 음식 대접과 약시중을 잘 하라’고 말입니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박석무 편역 / 창비


그곳에서 시작된 당신의 편지는 유배지 장기에 도착해서도 이어집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두 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종이 위에 적어 넣지요. 밤낮으로 빌고 원하는 것은 너희들이 독서하는 것이라고, 선비의 마음씨를 갖게 되길 바랄뿐이라며 《서경》과《예기》와 《사기》를 읽으라고 다그칩니다. 그러나 이런 편지를 쓰는 것도 잠깐, 당신은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의금부에 갇히고 맙니다. 형인 정약종이 중국인 신부와 함께 활동하고, 조카사위인 황사영이 서양의 큰 배로 조선을 구해야 한다는 백서를 썼기 때문입니다. 모진 고문을 받은 뒤, 당신은 목숨만은 건져 다시 강진으로 이배됩니다. 나주 율정에서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당신은 강진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습니다.


강진에 도착한 당신은 머물 곳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방을 내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강진 땅에서 당신은 규장각에서 근무하던 초계문신도 나랏님과 함께 일을 하던 동부승지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나라에서 금지한 서학을 믿은 대역죄인일 뿐이었지요. 사람들은 문을 닫아 걸고 당신이 지나가면 욕지거리를 하며 손가락질을 해댔습니다. 당신은 문초를 겪어 고통스런 몸을 뉘이고 싶었으나, 꽁꽁 얼어붙은 몸을 녹일 방 한 칸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당신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주막집 노파가 방 하나를 내어줍니다. 굶주린 이와 취객의 소리가 뒤엉켜 잠시도 조용하지 않은 곳이었지만, 당신은 감사한 마음으로 그 방에 머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지어 걸지요.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당신은 그곳에서 생각을 맑게 하고, 용모를 엄숙하게 하고, 과묵을 지키며, 행동을 신중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방문 너머가 아무리 시끄럽고 요란해도 네 가지를 지키려고 노력했지요.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마재에 있는 두 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독서만이 살 길이라고, 독서를 통해 폐족도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세상을 구했던 책을 읽으며 부디 사람이 되라고 말입니다.     


부인의 낡은 치마에 쓴 편지 <하피첩> /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주막집과 사찰, 제자의 집과 초당에서 쓴 당신의 편지를 읽으며 만약 당신이 나의 아버지였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봅니다. 망한 집안의 자손으로 낙인찍혀 외출조차 할 수 없는 내게 책을 읽고 정리하라고 한다면,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닭이라도 길러보겠다는 내게 닭에 대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계경(鷄經)’ 같은 책을 쓰라고 한다면, 내 맘을 알아주는 친구와 술 한 잔 하는데 술은 만악의 근원이라며 당장 술을 끊으라고 호통치는 편지를 받는다면 어떨까… 만약에 내가 20대였다면 편지 속 당신을 꼬장꼬장한 ‘꼰대 아버지’로 기억했을 것입니다. 집 안 사람들이야 굶든 말든 사사건건 참견하며 당신의 생각대로 움직이라고 하는, 절대 당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 불통의 아버지말입니다. 그러나 40대인 저는, 두 아이의 엄마인 저는, 편지 행간에 스며있는 당신의 마음을 읽습니다. 혹시라도 죄가 풀려 다시 세상에 나갈 수 있게 될 때를 준비하라고, 비루한 삶을 살고 있어도 정신만은 잘 갈고 닦으라고, 여섯 명의 아이를 잃는 참척의 고통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부디 술을 끊고 건강하게 살라고… 바라고 또 바라는 그 마음 말입니다.     


당신이 두 아들에게 쓴 편지 덕분에 당신은 내게 ‘사람’이 되었습니다. 범접할 수 없는 태산 같았던 당신이, 나처럼 울고 웃고 삐치기도 하는 사람이 되었지요. 능내의 강가를 걸으며 이곳에서 아버지로 살았던 당신을 떠올립니다. 함께하지 못한 시간의 공백을 메우려고 더 노력했을 당신을 말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내가 아이들과 함께 바라보고 있는 강의 윤슬을 두 아들과 함께 바라봤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아이와 손잡고 걷는 이 길을 당신의 손주들과 손잡고 거닐었을지도 모르고요.      


당신이 좋아했다는 강, 두물머리 앞에 서니 윤슬 위로 당신의 모습이 반짝입니다. 강진의 사의재에서, 만덕산의 초당에서 편지를 쓰고 또 쓰던 ‘아버지’당신이 말입니다.          



                                                                                    2019년 2월 20일 겨울 밤, 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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