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들이었어요. 그냥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지요. 그런데 내 몸은 무언가에 단단히 묶여 있어 내 마음대로 갈 수가 없어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다가,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수업을 했어요. 하나도 즐겁지 않았어요. 누군가 내게 마법 지팡이를 휘둘러 나를 ‘뿅’하고 사라지게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러다 몇 명의 이름이 떠올랐어요.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던 버지니아 울프와 ‘19호실’로 갔던 수잔과 ‘자신이 진정 누군지 알려고 샅샅이 찾아본다’고 썼던 실비아 플라스, 당신의 이름이었지요. 나는 책장에서 당신의 책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을 꺼냈어요. 언젠가 그림 그리는 친구가 알려준 책이었어요.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했는데 편지가 있다고, 꼭 읽어보라고 했던 책이었지요.
책을 꺼내 펼쳤는데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더군요. 이 책을 그 친구가 사서 보냈는지, 내가 구입했는지도 기억에 없어요. 분명히 읽은 책인데 마치 처음 보는 책 같았어요. 나는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겼습니다. 당신 딸이 쓴 서문을 읽었고, 당신이 사랑에 빠졌을 때 테드에게 쓴 편지도 읽었어요. 당신이 엄마에게 쓴 몇 통의 편지도 읽었지요. 그리고 당신이 그린 그림을 봤습니다. ‘천재 시인’이었다던 당신은 그림도 꽤 잘 그렸네요. 저는 ‘마이너스의 손’이라서 절대 이런 그림을 그리지 못하거든요. 나도 가끔은 마음이 보내는 소리를 글이 아닌 그림으로 그리고 싶지만, 눈앞에 있는 것도 그대로 그려내지 못하는 손은 마음의 소리를 그려내지 못한답니다. 그저 다른 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며 감탄할 뿐이에요.
책에 있는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당신이 삶을 사랑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삶에서 마주치는 장면들을 담아둘 만큼, 어떤 장면을 그리며 미래의 날들을 떠올릴 만큼이요. 당신은 편지에 썼지요. 이 그림들이 당신의 글과 함께 삽화로 실리면 좋겠다고요. 당신은 현재를 그리면서 미래를 생각할 만큼 삶을 사랑한 사람이었는데, 그걸 몰랐네요. 당신도 당신 곁에 있던 사람들도.
어쩌면 나도 그럴지 몰라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그냥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말하고 있지만, 어쩌면 나도 무언가를 잘 하고 싶고, 여기에서 행복하고 싶은 건지도 몰라요. 하지만 바람과 현실의 거리는 너무 멀리 있네요. 그 거리가 너무 멀어서 한 발 떼는 것 조차 두려울 때가 있지만, 그래서 모든 걸 놓고 싶을 때가 있지만... 걱정 말아요. 우리 집에는 가스 오븐이 없거든요. 코드 주머니에 돌을 잔뜩 넣고 걸어 들어갈 강도 없고, 혼자서 머무를 19호실도 없으니까 스스로 삶을 놓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저 마음이 혼란할 때마다 당신과 버지니아 울프와 수잔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에요. 당신들의 이름은 나를 위로해 주니까요.
............
며칠 계속 비가 내리더니 멈추었네요. 구름 사이로 해도 보이고요. 그래요. 인생의 날에도 날씨가 있어요. 먹구름이 끼는 날이 있는가 하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 있고, 폭풍이 몰아치는 날이 있는가 하면, 산들바람이 마음을 촉촉하게 하는 잔잔한 날도 있죠. 요 며칠 내 인생의 날씨는 장마 같았어요. 계속 悲가 내렸죠. 그래도 이제 날이 개려고 하나봐요. 구름에 갇혀있던 해가 ‘나 여기 있어요’하며 손을 흔들고 있네요. 비록 이런 날이 며칠 반짝, 하고 마는 날이라고 해도 맑은 날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어요.
자, 이제 창을 열어 바람 한 줄기를 방에 들입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고 쓴 폴 발레리를 기억하면서요.
당신의 묘지 위에도 바람 한 줄기 스쳐 지나가길, 바람이 전하는 안부에 당신도 이곳에 놓아둔 당신의 삶에 손 한 번 흔들어 주기를 바라며 인사를 전합니다. 고독의 시간 위에 있는 당신, 그럼 안녕.
- 2021년 5월 어느 날, 당신의 친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