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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큐레이터 Jan 06. 2022

프랑수아즈 사강, ‘고독의 희열’을 알았던 당신께

- 《패배의 신호》를 읽고

오랜만에 샹송을 듣고 있습니다.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패배의 신호》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기에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샹송을 듣고 있으면 ‘불어는 입술과 입술이 가장 많이 닿는 언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사랑을 속삭이기에도 좋다고요.      


그 아름다운 언어로 쓴 당신의 책을 읽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던 12월이었지요. 녹색광선에서 《패배의 신호》를 출간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당신의 작품 두 개를 읽었습니다. 당신이 어떤 작가인지 먼저 알아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 먼저 제가 당신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고백해야겠군요. 작년 12월 전까지 저는 당신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흘려 들은 이야기로 당신의 이미지를 만들었을 뿐이죠. 내게 당신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말을 남긴 ‘당돌한 아가씨’였습니다. 이런 말을 남기고 요절했다고 기억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정보였습니다. 당신은 ‘요절로 박제된 젊은이’가 아니었어요. 열여덟 살에 《슬픔이여 안녕》을 발표한 이후 2004년 심장과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소설과 희곡 등을 꾸준히 발표한 ‘현역작가’였지요.      


제가 읽은 당신의 작품은 《슬픔이여 안녕》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였습니다. 나는 이 작품들을 읽으면서 놀라고 또 놀랐습니다. 어떻게 열여덟 살의 아이가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을까? 어떻게 스물 네 살의 젊은이가 중년의 감정을 그릴 수 있을까? 놀라고 또 놀라고 말았지요. 그래서 《패배의 신호》를 설레는 맘으로 기다렸습니다. 가장 통속적인 ‘사랑’을 가장 통속적이지 않게 쓰는 당신의 작품을요.     


《패배의 신호》가 도착했던 날, 나는 오랫동안 책의 표지를 바라봤습니다. 쨍한 오렌지색 안에 있는 흑백 사진 한 장을 오래오래 바라보았어요. 창가에 기대 창 너머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을요. 그리고 천천히 책장을 펼쳐 당신의 글을 읽으며 루실과 샤를, 디안과 앙투안을 만났습니다. 각 자의 방식대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을요.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생에 한두 번쯤 사랑에 대해 같은 정의를 내리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때 우리는 ‘진격하는 사람’이 됩니다. 앞 뒤 잴 것 없이, 옆을 바라볼 틈도 없이 서로를 향해 진격하고, 함께 나란히 달려갑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정의가 겹칠 때 몸도 마음도 하나가 된다는 걸. 루실과 앙투안이 그랬던 것처럼요.     


언제나 뜨거운 사랑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저이지만, 이번에는 디안과 샤를의 마음에 머물렀습니다.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퇴각의 북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던 두 사람의 마음에 제 마음을 포갰습니다. 점점 커지는 소리를 외면하며 그저 지나가는 소리일거라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두 사람을 보면서, 어쩌면 ‘패배의 소리’는 모든 감각을 잃게 하는 주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



《패배의 신호》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저는 ‘고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네 명의 주인공이 선택한 것은 결국 ‘고독’이었으니까요. 그제야 당신이 책 서두에 샤를의 입을 빌려 루실이 갖고 있는 희열이 ‘고독의 희열’이었다고 쓴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사랑은 결국 고독으로 가는 길’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다시 책의 표지를 바라봅니다. 창에 기대 창 너머를 바라보는 여인은 루실이 되었다가 디안이 되었다가 앙투안이 되었다가 샤를이 됩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창 너머 세상이 아니라 ‘퇴각의 북소리’를 따라 온 ‘고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겠지요. 고독이 된 사랑도 사랑이라는 것을.  

   

프랑수아즈 사강. 모든 것이 퇴각하는 겨울에 《패배의 신호》로 내게 와 주어 고맙습니다. 사는 동안 얼마나 더 많은 ‘패배의 신호’를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처럼 퇴각한 후에 다시 진격하는 날이 온다는 것을 믿겠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믿었던 것처럼.          


《패배의 신호》, 프랑스와즈 사강, 장소미, 녹색광선,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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