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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큐레이터 Sep 21. 2022

침묵으로 기도한 라파엘의 편지

편지책으로 읽는 교회 #9



리엘! 넌 말하는 걸 좋아하니? 샘은 말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야. 물론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을 때도 있지만, 하루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내는 건 힘든 일이야. 어쩔 수 없이 어딘가에 격리되어 계속 혼자 지내야 한다면 또 모를까, 옆에 다른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키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말야, 세상에는 스스로 ‘침묵’을 선택하고, 그 고요로 하느님께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단다. 봉쇄수도원에 살았던 성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 수사님처럼 말야.      


라파엘 수사님은 스페인에 있는 산 이시드로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수도자였어. ‘트라피스트’는 엄격한 봉쇄 속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관상수도회야. 고독과 침묵 속에서 기도하며, 하느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수도자들이 모인 곳이지. 라파엘 수사님이 이 수도원에 찾아 간 것은 1930년 여름의 끝이었어. 삼촌의 소개로 수도원에 하루를 머물게 됐는데, 그 짧은 시간에 수도원에 매료되고 말았단다. 라파엘이 수도원 성당에 도착해 주님께 인사를 드릴 때, 수사님들이 가대에서 시편을 읊고 있었대. 그 때 성모님과 함께 제대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때 라파엘은 무언가를 느꼈던 것 같아. 그 후, 성당 안에 있는 수사님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도 볼 수 있었고. 그리고 다음 날에는 밭에서 일 하고 있는 수사님들을 통해서 ‘사람들은 여러 길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으로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는 걸 말이야.   

  

그 날 이후, 라파엘은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하기를 꿈꿨어.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산 이시드로 수도회에 입회를 했지. 그러나 그는 입회 4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가야 했어. 당뇨병이 발병했는데 수도원에서는 치료할 수 없었거든. 집으로 돌아간 라파엘은 늘 수도원을 그리워했어. 하루 빨리 수도원으로 돌아가 하느님을 공경하고 싶어 했지. 그는 병을 치료하면서 수도원장 신부님께 편지를 썼어. 수도자가 되지 못해도 좋으니, 다시 수도원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야. 그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분을 사랑하며, 그 분 만을 온 정성을 다 쏟아 섬기는 것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겠다’며 애원했어. 수도원장 신부님은 그의 편지를 읽고, 라파엘이 수도회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어. 라파엘은 1936년 1월 15일에 산 이시드로 수도원으로 돌아갔단다. 수도원을 떠난 지 1년 8개월 만이었어.     


<어느 한 트라피스트 수도자의 묵상>, 성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여자 수도원 / 불휘미디어


라파엘은 수도원에서 기도하고, 일하며 하느님을 찬양했어. 글을 쓰기도 했고, 스테인드글라스에 들어갈 그림을 그리기도 했어. 그러나 그 후로도 두 번이나 더 수도회를 나가야했어. 스페인 전쟁으로 징집 명령을 받기도 했고, 병이 악화 돼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도 했어. 라파엘은 무척 슬펐지만 기도하고 또 기도했단다. 수도원에서 침묵으로 하느님을 공경할 수 있게 되기를, 하느님께서 그것을 허락해 주시기를 말이야. 바라던 대로 그는 1937년 12월 15일에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가게 됐어. 10개월 만의 복귀였지만 라파엘은 알고 있었단다. 이번이 수도원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날이라는 걸. 동시에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할 거라는 걸 말이야. 라파엘은 자신의 병이 낫지 않을 거라는 걸 예감했던 것 같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에 돌아간 라파엘은 투병 중에서도 묵상하며 하느님을 공경했어. 때론 글을 쓰기도 했고, 때론 그림을 그렸지.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로 하느님을 찬양했어. ‘어떤 사람은 날면서, 어떤 사람은 뛰면서, 또 다른 사람들은 걸려 넘어지면서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는 걸 알았던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면서 하느님을 공경했던 거야. 그러다 4개월 후인 1938년 4월 26일에 하느님 품에 안겼단다.     

1989년 8월 19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라파엘 수사를 현대 젊은이들의 모범으로 제안했어. 1992년 9월 22일에 시복된 라파엘은 2009년 10월 11일에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되었단다.     


샘이 라파엘 수사님에 대해 알게 된 건 《어느 한 트리피스트 수도자의 묵상》이라는 책을 통해서였어.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여자 수도원에서 발행한 책인데, 라파엘 수사님이 쓴 편지와 글을 볼 수 있단다. 4년 동안 수도자로 살면서, 세 번이나 수도회를 나와야했지만, 큰 고통 중에도 침묵으로 기도하며 하느님만을 공경했던 성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 그의 이야기를 너도 읽어보지 않을래?                 


                - 천주교 서울대교구 중고등부 주보 <하늘마음>에 실린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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