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취기와 온기
준비물
위스키 1 shot (Dalmore Valour), 홍차 약 200ml (Twining Christmas tea), 꿀 1~2T, 레몬즙 약간, 시나몬 스틱
*취향의 문제인지라 모두 정확하게 계량하지 않았다.
만드는 법
1. 적당한 잔(두꺼운 유리잔을 선호)을 찾아 뜨거운 물로 잔을 미리 데워둔다.
2. 홍차를 평소보다 진하게 우려둔다. (물 200ml에 4분 우렸다.)
3. 잔에 있던 물을 따라내고 위스키 1 shot과 꿀을 넣고 저어준다.
4. 3에 다 우려낸 홍차를 추가하고 레몬즙 약간을 넣고 섞는다.
5. 시나몬 스틱으로 장식하여 완성한다.
좋은 것과 좋은 것이 만나면 엄청 좋은 것이 된다.
칵테일이라는 것은 다양하고 독특한 향을 내는 각자의 재료들이 만나면서 조화롭고도 완전히 새로운 향을 내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아주 잘 알진 못해도 종종 칵테일을 즐기는 편인데, 다양한 리큐르와 난해한 재료들이 많이 필요해서 집에서는 쉽게 제조해 먹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레시피를 뒤적일 때마다, 이런 것들이 섞여 이런 맛이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느끼는 재미는 꽤 쏠쏠했다. 각자 나름의 색깔과 멋이 있는 재료들이 전체 중 하나의 요소로서 맛의 탄탄함을 책임지는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 신선했다. 그리고, 심지어 식탁 위의 재료라고 생각했던 청양고추까지 집어넣은 칵테일을 발견했던 날, 자기주장과 향이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한다면) 모든지 칵테일 재료로 쓸 수 있는 것 아닌지 생각하다가 이 세상에서 향이 있는 것이라면 지지 않는 재료가 떠올랐다. 바로 차였다.
사실 나에게 티 칵테일의 역사는 처음은 아니었다. 내가 처음 제조했던 티 칵테일은 몽골의 초원에서 먹었던 딸기차 냉침 보드카였다. 몽골 여행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초원에는 식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전에 술이며 음료며 한껏 장을 보곤 하는데, 그때 우리의 일행들은 그야말로 몽골 보드카의 매력에 푹 빠져있었기 때문에 (그냥 몽골에서 먹는 몽골 가격의 보드카라서 좋았다...) 운반 능력이 허용하는 최대치로 보드카를 이고 지고 했던 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보드카를 샷으로 먹기엔 부담스러워서 토닉 워터며, 주스며 섞어먹을 다양한 음료를 준비해 갔는데, 아무래도 제조 비율 때문인지 며칠이 지나자 음료는 없고 보드카만 남아버렸다. 8월임에도 쌀쌀한 몽골 초원의 밤에 샷으로 보드카를 마시는 것도 뭐 나름의 매력은 있었다만 그래도 너무 심심해서 뭔가 방법이 없을까 열심히 고민하던 차에, 감기 걸린 일행 먹으라고 사온 딸기차 티백이 눈에 보였다. 홍차도 녹차도 아니고 과일차인데(게다가 난이도 최하 딸기차!) 그냥 보드카에 담그면 딸기향이 배지 않을까? 생각했고,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딸기의 상큼한 향, 그러나 딸기'차'라는 형태 특유의 부담스럽지 않은 은은한 단맛이 보드카에 스며들어 꽤 산뜻한 맛이 되었다. 어쨌든 그때는 진지하게 임했던 건 아니었고 이가 없는 이의 잇몸으로서 시도해본 것이어서, 한 번의 흡족함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 술은 계속 좋아하고 있었고 차의 세계에 입문해보니, 좋아하는 것 두 가지를 섞어보고 싶어 졌다. 그런 칵테일의 레시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또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니어서, 어렵지 않은 초보 레시피로 찾아보던 차에, 원래 알고 있던 핫 토디를 뜨거운 물이 아닌 홍차로 만드는 버전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티 칵테일이라는 것 자체도 내가 좋아하지만 흔하지 않은 조합인데, 게다가 '따뜻한'+차+술의 조합이라니... 애초에 뜨겁게 먹는 술의 범위가 너무 한정되어 있어 겨울마다 주구장창 뱅쇼만 끓이던 나였는데, 새로운 겨울 술의 세상이 열리려는 것이었다. 좋은 것과 좋은 것을 섞어서 좋은 방식으로 먹는다니...! (게다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 베이스!)
한 가지 고민했던 것은, 위스키와 홍차 모두 각각의 색깔이 너무 강하고 스펙트럼도 넓어서,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맛이 나올 것 같았다. 사실 위스키만 놓고 말하자면 나는 크리미한 맛이나 과일 향이 많이 나는 위스키보다는 훈연 향이 많이 나고 단맛이 적은 것들을 좋아해서, 그런 위스키와 스모키한 얼그레이 같은 걸 조합하면 어떨까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의 초심자이기 때문에, 핫 토디라는 음료의 본래 특성을 가장 무난하게 잘 살려줄 수 있는 조합으로 간다. (정식으로 도전하는 첫 티 칵테일인데, 첫 잔부터 망해버리면 다신 안 할 것 같았다...) 따뜻한 겨울 음료로서의 본질은 뱅쇼가 지닌 그 성질과도 같다. 바로 뜨거움, 달콤함, 부드럽고 과실 향, 그리고 시나몬이다. 그 성질들이 있어야만 몸을 따끈하게 데우면서도 달콤함이 피로를 풀어주고, 이것은 술이 아니라 건강 음료야, 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성질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우선 위스키는 달콤하고 캐러멜 향과 과실 향이 듬뿍 나는 달모어를 골랐다. 그래도 명색의 티 칵테일 첫 도전이라 싱글몰트로 넣고 싶었고, 내가 갖고 있는 싱글몰트 중에 가장 달고 부드러운 맛인 달모어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너무 달아서 평소에 집에서 잘 안 먹는다... 사슴 모양 무늬는 멋진데...) 한편, 차는 뭔가 독특한 향미를 주기 위해 얼그레이 계열을 쓰는 것 같던데, 나는 이 계열의 최강자, 눈에는 눈, 겨울 음료에는 겨울 음료라는 심정으로 트와이닝 크리스마스 티를 우렸다. 홍차 브랜드에서 크리스마스 이름만 붙으면 시나몬과 정향의 페스티벌이기 때문에, 따로 향신료를 넣지 않아도 그런 느낌을 잘 살려줄 거라 생각했다. 동네 친구가 몇 개 쥐어준 티백이 이번 겨울 여러 모로 좋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조합의 결과는, 아주 안정적인 성공이었다. 예상했던 바로 그 맛이었다. 달달한 쉐리의 향기와 시나몬의 향기가 어우러지고, 데운 술에서 느껴지는 그 나른한 알코올의 향과 따끈한 온도 때문에 몇 모금 먹기만 해도 온 몸에 땀이 배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자칫 너무 과할 것 같은 단맛을 살짝 첨가한 레몬즙이 잡아주니 또 너무나 조화롭다. 무엇보다도 겨울 음료로서의 최강 강점은, 뱅쇼보다 만들기가 쉽다는 것이다 핫핫... 1인 가구에게 와인이란 애초에 부담스러운 음료이고, 게다가 평소에 잘 사다 먹지 않는 시트러스 계의 과일을 넣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한 솥 끓여서 많이 많이 먹어야 한다는 점이 귀찮았는데, 이것은 단 한 잔만 제조하기가 너무 쉬웠다! 추운 바깥에서 고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들어와 급하게 보일러를 틀고 한잔 따끈하게 마시기에 최고의 음료를 발견한 것이었다. 집에 술이며 차며 항상 쌓아놓고 사는 맥시멀 리스트는 이래서 행복하다!
다음에는 조합을 바꾸어 좀 더 스모키한 라인이나, 다른 가향 홍차로도 한번 시도해 보려고 한다. 술과 차를 사랑하고 아끼는 그 진지한 마음만 있다면, 뭘 시도해도 엄청 괴랄한 작품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