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하는 것의 아트
준비물
찹쌀, 콩, 팥 (텃밭에서 받은 거라 양을 계량하지 않고 때려 넣었다)
만드는 법
1. 콩은 깨끗이 씻은 후 물에 1시간 이상 불려놓는다.
2. 팥은 깨끗이 씻은 후 팥이 잠길 정도로만 물을 넣고 한번 팔팔 끓여 준다.
3. 2번에서 끓인 물은 버리고 다시 팥의 3배 정도 물을 넣고 뭉근하게 끓여준다. (10~15분정도?)
4. 찹쌀은 압력솥인 경우 미리 불리지 않고 헹구어 둔다.
5. 콩, 찹쌀, 팥과 함께 3번의 두 번째 팥물을 넣고 밥을 짓는다. (밥솥으로...)
나는 요리와 음식을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이번 언니네 텃밭 꾸러미를 받고 나서 알았다. 나는 한 번도 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노라고. 밥을 요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고.
물론 한식을 먹고 자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밥의 스타일에 대한 선호는 존재하는 편이다. 입 안에 끈적끈적 엉키는 식감이 싫어 진 밥보다는 꼬들밥을 더 좋아하는데, 엄마의 취향과는 다른지 엄마 밥을 먹고 살 때는 그것이 나름의 불만이었다. 그러나 아무튼 상당히 충실한 식단으로 평생을 살아온 탓에 밥이라는 음식 자체에 대한 애정이 깊은 편이고, 빵에도 흥미가 별로 없고 고기에도 별로 흥미가 없었어서 전형적인 밥순이였다. 그래서 단백질 비중을 늘리고 탄수를 제한해야 하는 다이어트 상황에서는 또 상당히 괴롭기도 했다. 소위 말해 '먹은 것 같지 않'은 느낌.
그러나 그것이 내가 밥에 대해 까다로운 미식을 적용하는 소위 말해 '밥믈리에'라는 것은 아니다. 밥에 민감한 사람들은 쌀의 산지나 브랜드, 밥을 짓는 도구의 유형(전기/압력/솥), 부재료 등 여러 요소들을 상당히 세심하게 들여다보는데, 나는 그냥 평범한 한국인 정도라고 생각한다. 물론 돌이켜 보면 특히 맛있었던 밥들은 있었다. 제대로 된 한식, 특히 쌀의 산지를 내세우는 이름의 쌈밥집, 백반집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솥밥의 따끈함은 항상 마음을 풍족하게 한다. 클리셰 같지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이라는 표현이 왜 클리셰쳐럼 많이 쓰이는지 마음 깊숙이 공감과 감동이 돌고, 그런 집에 가면 꼭 또 과식을 하곤 했다. (배가 부르지만 누룽지까지 아둥바둥 비우는 이유는 그냥... 솥 설거지 쉬우시라고... 물 안 부어 놓으면 얼마나 설거지가 힘들겠는가....) 그렇지만 또 맛없는 밥에 민감한 스타일도 아니다. 나는 모든 음식에 상당히 관대한 스타일이라, 사실 미식가가 아니고 그냥 대식가일지도 모르겠다. 맛있는 것을 선호하지만 맛없는 것에 둔감한데, 특별히 튀는 점이 없는 밥이라는 음식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유럽에 살던 시절 한인마트에서 산 전자레인지용 1인 밥솥에 원산지를 알 수 없는 쌀(한국어가 적혀있지만 왠지 중국쌀일 것만 같은)을 돌려 먹곤 했는데, 밥 맛이 훌륭하진 않았겠지만 빵의 나라, 빵의 동네에서 밥의 소중함이 더 많이 느껴져서였을까? 그냥 그런대로 소중하게 즐겁게 먹었던 것 같다.
밥에 대해 그렇게 무디게 된 것은 물론 매일매일 먹는 것이라는 점과 별 특이한 맛이 없다는 점도 있겠지만, 또 하나의 요인은 밥 맛이 대체로 상향 평준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한국인의 위대한 발명품, 밥솥이라는 물건 때문이다. 밥과 물의 양을 때려 넣고 시간이 지나면 칙칙폭폭 신비로운 소리와 증기를 내뿜으며 어느새 촉촉한 밥이 완성되어 있는 것은 요리보다는 마법에 가까운 것 같다. 사실 밥솥을 이용한 밥 짓기에는 요리라고 부를만한 어떤 과정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하긴 하는데 내가 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것이라곤 재료 세척과, 완성 밥 젓기 정도일 것이며, 그 밖의 일들은 밥솥이 다 알아서 하는데 심지어 그 꽉 닫힌 밥솥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볼 수조차 없다. 그 안에서 한식 요정이 불을 때는지, 밥알들이 뮤지컬 영화처럼 춤을 추는지 어쩌는지 모른 채 그저 기다림 뿐. 뚜껑을 열어보면 모든 사태는 정리되어 있다. 그래서 솔직히, 집안일에 능숙하지 않다는 의미로 밥 한번 지어보지 않았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역설적으로 정말로 능숙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말이다. 이렇게 쉬운 줄 알았으면 못 한다고 말하기도 머쓱하지 않을까? 아니 게다가 밥솥까지 갈 필요도 없이, 솔직히 햇반이 너무 맛있다...
그런데 이번 대보름에 처음으로 잡곡밥, 그것도 이곡도 아닌 삼곡밥을 지어본 것이다. 아니 솔직히 이것도 밥솥으로 만든 것이니 뭘 지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늘 현미, 백미만 먹다가 팥을 삼고 콩을 불리고 뭐 그런 과정들이 필요해지면서 처음으로 '밥 짓는 법'의 레시피를 검색해본 것이다. 물론 작게는 콩나물에서 크게는 도미나 굴까지 다른 재료가 올라가는 솥밥은 엄밀히 말해서는 약간 요리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다른 형태의 식재료가 들어가지 않고 곡물만 들어가는 밥에 대해서도 이런 전처리 과정이 필요하다니. 팥을 두 번이나 삶아야 한다는 것은 약간 충격이었다. 팥이란 것의 성질이 한번 삶아야 독성이 빠진다는 것을 이전에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또 새로 지은 삼곡밥의 맛은 얼마나 풍미가 고소한가. 처음으로 완성된 밥을 한 입 먹어보는 순간, 입안에서 펼쳐지는 고소함의 향연. 집에서 나와 산 후 잡곡밥을 먹을 일이 없었구나, 란 생각과 더불어 밥이란 것은 요리이며 음식임을 절절히 깨달은 순간이었다. 물론 냄비밥, 솥밥의 영역으로 간다면 그것을 훨씬 더 절절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어쩌면, 밥이란 것도 요리라서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할 것이다. 요리의 가장 기본인 불 조절의 본질에 대해 새로이 익히게도 될 것이다.
요리로서의 밥을 충분히 존중하기 위해서, 솥밥을 위한 냄비를 또 구매해야 하나... 머릿속 한식 요정과 소비 요정을 진정시키고, 마님은 왜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셨는지, 흥부는 뺨을 맞고도 붙어있는 밥풀떼기까지 떼어먹었는지, 그런데 또 재수 없는 사람을 밥맛이라고 하는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밤이다. 다들, 밥 잘 챙겨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