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다리는 반나절의 시간
재료 (1인분)
얼그레이/아쌈 등 찻잎 약 10g
설탕 18g~20g
우유 240~250ml
물 50ml
만드는 법 (유튜브 찻집사장 레시피 참고)
1. 찻잎 10g을 계량한다. (나는 ctc인 타지마할 홍차와 포트넘앤메이슨 얼그레이 클래식을 블렌딩했다)
2. 물 50ml을 끓여 차를 3분 우린다.
3. 완성된 2번에 설탕을 넣고 잘 녹여준다. (앵무새설탕 1조각이 5~7g정도 되는듯 해서 세 개)
4. 설탕이 완전히 녹았다면 우유를 부어준다.
5. 찻잎과 우유가 섞이게 잘 흔들어준 뒤 6시간 정도 숙성시켜준다. (나는 자기 전 만들어놓고 아침에 맛을 봤다)
지난 겨우내 차의 세계에 입문해서 서양차, 중국차, 한국차 가리지 않고 마셨다. 작은 살림이지만 당당한 맥시멀리스트답게 이런저런 종류별로 차를 마련해둔 탓에, 부족한 마음 들지 않게 한껏 즐겼다. 그래도 한 겨울 눈 내리던 계절에는 몸을 뜨겁게 하는 보이차를 여러 번 우려마시며 등에 촉촉하게 땀이 배는 것을 느끼곤 했었고, 매서운 추위가 가실것 같던 날들에는 달콤한 베이커리와 함께 진한 홍차를 곁들이며 잠을 깨거나, 그것이 부담스러울 땐 구수한 쑥차나 발효차를 편안하게 마시기도 했다. 그 많은 차들은 결국 차 나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온 친척들인데, 각자 다른 맛과 매력으로 나의 시간들을 다채롭게 채색한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찬 음료를 그렇게 선호하지 않는 내가 문득 얼음 띄운 차가운 것을 만들어먹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새 계절이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집에 가만가만 내리쬐는 햇살이 어떤 시간에는 조금 덥게도 느껴질 때, 주말 오후 달콤한 낮잠을 잘 때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오후의 상쾌한 공기와 새소리를 듣고 싶어졌을 때, 바로 그런 날이 문득 차가운 음료에 도전하는 날이고, 그 날은 나도 모르는 새에 갑자기 찾아온다. 이 시기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트렌치 코트를 입고 외출했다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외투를 입지 않거나 반팔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머쓱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찬 음료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는 몸을 차게 한다는 온도의 측면도 있지만, 차가움 탓에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는 것도 있었다. 시원하고 청량하며 갈증을 풀어주는 맛은 있지만, 입안에 머금고 천천히 음미하기에는 너무 차갑고, 아무리 찬찬히 살펴봐도 입안에 머금은 음료가 미지근해질 때까지는 다양하고 깊은 맛을 찾아내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엄청난 티 전문가도 아니지만, 온국민이 아이스 커피를 거부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대중적인 의견에 어쩐지 작은 한 손 더 들고 싶은 마음. 아니 어쩌면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더 어려운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적정 온도에서 정확한 시간으로 우려 천-천히 음미해도 그 맛의 스펙트럼을 찾아낼까 말까인데, 게으른 혀를 꽁꽁 얼려버리기까지 하니 어영부영 일하며 퍼져버릴 수밖에. 게다가 커피도 아니고 차라면 상황은 더욱 나쁘다. '우러남'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물의 온도에 상당히 민감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냉침이라는 것이 있는데, 누가 발견했는지 참으로 기특하다. 와인에 대해 조상님 중 도대체 어떤 분이 멀쩡한 포도를 으깬 다음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두고 심지어 그것을 마셔본 걸까? 라고 코멘트를 한 것을 보고 좀 웃었는데, 길면 3분을 우리라는 홍차를 누가 6시간동안 넣어두고 맛볼 생각을 했던 걸까? 그리고 또 누가 그냥 홍차도 아니고 밀크티를 6시간동안 넣어둘 생각을 했던걸까? (뭐 물론 와인보다는 덜 기괴하고 할 법한 실험이긴 하다) 게다가 냉침을 하면 일반적인 차보다 카페인 함량이 약간 낮아지기도 한다니 더없이 좋다.
하지만 직접 만들어보니, 여러가지 계량 및 제조과정과 함께 6~9시간 이후의 나와 쿵짝이 잘 맞아야 하니 확실히 어려운 점은 있다. 반나절 후의 내가 과연 밀크티를 먹고 싶을지, 그냥 뜨거운 티를 마시고 싶진 않을지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물론 찻잎을 걸러내고 냉장 보관했다가 먹어도 된다...) 어떤 음료를 제조하는 데에 있어 그렇게 기다림의 과정이 있는 것이 불편하고도 신선하다. 그렇다고 발효로 칠 정도로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닌, 차가 우러나는 그 반나절의 시간은 고요하다. 어두운 냉장고 속에서 찻잎들은 조용히 잠들어있다. 뜨거운 물에서 대류를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조용히 천천히, 침잠할 것이다. (또 안도현님의 게에 관련된 시가 생각나네...) 요즘 힙한 카페들에서 밀크티 보틀을 어마어마한 가격에 파는 걸 보고 좀 놀랐는데 조금 납득이 되기 시작한다.
어쨌든, 날 좋은 주말 피크닉에 가기 전날 밤, 설레는 마음으로 밀크티를 제조해본다. 산뜻하게 우러나길 바라며 신중히 찻잎을 고르고, 원하는 대로 맛이 나길 바라는 과정은 다음 날 비가 오지 않길, 무사히 소풍에 갈 수 있길 바라는 하나의 의식과도 같았다. 그리고 올해 처음 반팔을 꺼내고 그 가벼움에 놀라며 두손 묵직하게 챙겨 나간 피크닉의 맛은, 달콤하고 향긋했으며 무겁고도 산뜻했다. 이제는 밖에 앉아 볕을 쬐며 (방역 수칙을 지키며) 밥 한끼를 먹기도 하는 그런 계절,
얼어죽지 않아서 아이스 티의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