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내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유산

by 류하정

새 집에서 맞는 아침은 여전히 낯설다.
누군가의 기척에 눈을 떠야 했던 수많은 날들과는 달리,
이제는 누가 내 하루를 대신 시작하지 않고, 내가 나를 깨우는 감각으로 하루를 맞이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낯설기도 하다.


처음 며칠은 그 고요함이 마치 어색한 옷처럼 느껴졌다.
내가 정말 ‘혼자’라는 실감이 들었고, 처음으로 감정을 감시받지 않는 공간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몸은 자유로웠지만, 마음은 아직도 이전 집의 소음과 무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는지 가끔은 누가 부를 것 같아 고개를 돌리기도 했고, 정적이 길어질수록 마음속의 불안도 함께 올라오곤 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멈춰 있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가 지금 ‘다른 방향’을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모든 과정은 나를 위한 준비였다는 걸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이제 나에게는 나만의 아침이 있다.
누구에게 맞춰 일어나는 게 아니라 내가 눈을 뜨는 그 순간이 하루의 시작이 되고, 내 리듬대로 움직이며 하루를 설계할 수 있는 권리가 처음으로 내 손안에 놓였다.
욕실 거울 앞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가장 먼저 인사한다.


“잘 버텼어. 오늘도 괜찮아질 거야.”


그 짧고 단순한 문장이 어쩌면 하루 전체를 통째로 지탱해 주는 묘한 마법처럼 작용할 때가 있다.

뜨거운 물로 차를 내리고 창문을 열어 햇살을 들이면서 나는 작은 노트에 손으로 하루의 감정을 정리한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내가 나의 내면을 다시 확인하고 다잡기 위한 가장 사적인 루틴이 되었다.


“어제보다 조금 나아졌어.”
“여전히 불안하지만, 숨은 편해졌어.”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내 감정에 더 집중하자.”


그런 말들을 천천히 적어가며 나는 생각한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일이야말로, 이제 내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삶의 기본이라는 걸.

나는 더 이상 무조건 열심히 살고, 누구에게든 착하고, 모든 걸 감당해 내는 존재로 보이는 것이
좋은 엄마, 좋은 사람이 아니란 걸 안다.


대신 나는 나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무너질 땐 무너질 수 있다고 말하며,
다시 천천히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블로그 글도 달라졌다.
예전엔 생계를 위해,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정보로 채워졌던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에 두세 개의 글을 쓰더라도 그 안에 나의 호흡과 온기를 담는다.
문장 하나에 나의 리듬이 묻어나고, 소제목 하나에도 ‘지금의 내가 살아 있는 이유’가 스며든다.


누군가는 그 글을 읽고 상담을 요청해 오고, 누군가는 “이 문장을 보고 눈물이 났다”는 댓글을 남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깨닫는다.
내가 살아서 쓰는 언어는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닿음이, 아이에게도 흘러간다는 것을.


경제적 루틴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큰 수익은 아니지만, 내가 직접 설계한 강의 콘텐츠와 PDF 워크북을 통해 정기적인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 돈은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 내 아이의 하루와 내 일상을 지탱하는 토대이며,
더 이상 나는 이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어렵고 버거워도 이 삶을 내가 만든다는 사실이 나를 주체로 세워주는 진짜 기반이 되어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와의 시간이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전에는 늘 지쳐 있었고 아이의 말에 진심으로 반응하기 힘들었고, 그 공백을 죄책감으로 채우려 애썼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나는 이제 아이와 함께 있는 그 시간 안에 나의 의식과 감정이 함께 머물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아이에게도 분명히 느껴지는 변화였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아이와 마주 앉아 하루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아이의 표정이 문득 달라지더니 이렇게 말했다.


“엄마, 요즘은 나랑 있을 때 진짜 웃는 얼굴이 더 많아졌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그래, 이게 내가 지키고 싶었던 삶이었구나.
이 웃음을, 이 감정을, 이 여유를 나는 너에게 남기고 싶어.’


나는 더 이상 불안과 희생을 아이에게 유산처럼 물려주고 싶지 않다.

대신 ‘엄마는 자기 삶을 자기 힘으로 지켜낸 사람이야’
‘무너지지 않고 일어나는 법을 아는 사람이야’라는 기억을 남기고 싶다.


이것이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단단하고도 조용한 힘이라고 믿는다.

이제 나는 견디는 삶이 아닌, 살아내는 하루를 시작했다.


누군가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내 감정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오늘도 나는 아주 작지만 정직하게,
내 아이에게 물려줄 ‘새로운 유산’을 하나씩 써 내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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