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나는 착한 아이였다. 아니, 어쩌면 착한 아이처럼 보이기 위해 애썼던 아이였다. 집 안에 무언의 긴장감이 맴돌 때면 나는 누구보다 먼저 눈치를 챘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조금만 높아져도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특히 엄마의 표정이 굳는 순간, 나는 아무 말 없이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몸을 숨기거나, 내가 뭘 잘못했는지를 먼저 되짚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의 어린 생존 방식이었고, 누구보다 빠르게 배운 가족 안의 룰이었다.
설령 그 상황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먼저 사과했다. 상대방의 기분을 풀기 위해 웃었고, 불편함이 느껴지는 순간에도 "괜찮아"라고 말했다. 내 감정보다 중요한 건 상대의 감정이었고, 그 감정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그 방식은 내가 만든 게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무의식 중에 체득된, 나의 본능이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집안의 공기가 무거워졌고, 그 무게는 언제나 나에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엄마는 "넌 왜 그렇게 예민하니?"라고 자주 말했다. 그 말은 단순한 푸념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느끼는 감정 자체를 무시하는 말이었고, 나로 하여금 내 감정을 의심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결국 나는 '예민한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안고 살아야 했고, 그 말이 나오기 전에 미리 내 감정을 눌러버리는 습관을 들이게 됐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배웠다. 내 감정보다 엄마의 기분이 중요하다는 것을. 내 입장은 항상 뒤로 미뤄야 하고, 내가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건 누군가를 더 불편하게 만들 수 있으니 되도록이면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내 감정은 늘 사치였고, 불편함을 드러내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처럼 여겨졌다.
그게 바로 내가 배운, 가족 안에서의 생존법이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엄마의 눈빛이 변하는 순간이면 그 말은 목구멍 깊은 곳에서 사라졌다. 한 번도 나오지 못한 말들이 내 마음속에 고여만 갔고, 그 대신 나는 다른 말을 선택해야 했다.
"그 정도는 이해해야지. 내가 너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런 말들은 하나의 주문처럼 반복됐고, 나의 감정을 정당하게 표현하는 순간조차도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엄마에게 서운하다고 말하는 것은 곧 나쁜 딸이 되는 것이었고, 동생에게 짜증을 내는 일은 내가 여유 없는 사람이라는 자책으로 이어졌다.
결국 나는 표현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고, 조용히 삼키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야 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점점 더 착한 사람이 되어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착한 사람이 아니라, 죄책감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 감정은 성인이 된 후에도 내 삶의 구석구석에 자리 잡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만의 가정을 꾸린다고 생각했지만, 그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엄마는 손주를 봐주겠다는 이유로 내 삶에 다시 들어왔고, 동생은 “같이 사는 게 편하잖아”라는 한마디로 그 자리를 자연스럽게 차지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건 '돌봄'이 아니라 '통제'였다.
내가 조금 늦게 들어오면 “애 맡기고 다니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라는 말이 돌아왔고, 피곤해서 아이 간식을 챙기지 못하면 “엄마가 돼서 그것도 못 하냐”는 비난이 따라붙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도와주는 사람들'이라 말했고, 나는 그것을 부정할 수도, 온전히 고마워할 수도 없는 애매한 감정 속에서 더 깊이 침잠해 갔다.
처음엔 그 말이 고마웠다. 정말로 일이 많을 땐 누군가 아이를 맡아주는 게 큰 도움이었고, 나름대로 그들의 수고를 인정하려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고마움은 무기가 되어 돌아왔다. “우리가 얼마나 도와주고 있는데”, “우린 너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희생하고 있는 건데”라는 말들은 나를 미안하게 만들었고, 그 미안함은 곧 죄책감이 되어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유독 일이 몰려 정신이 없던 날이었다. 그 시기 나는 공동구매를 통해 수입을 벌고 있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상품 페이지를 작성하고, 고객 문의에 답변하고, 업체와 협의하며 긴박한 하루를 버텨야 했다. 하나라도 놓치면 그날의 수입이 통째로 사라질 수 있는 구조 속에서 나는 나를 쪼개가며 일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 하원 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조심스럽게 엄마에게 아이를 데리러 가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일 있어서 못 가. 미리 말을 해야지. 갑자기 말하면 내가 정해놓은 일들은 어떡해? 시간 바꿔서 가볼게. 앞으론 미리미리 얘기해."
동생에게 부탁해야 했을 때는 차비를 줘야 했고, 간식비까지 줘야 했다. 그저 내 아이를 데리러 가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일이니 나는 부탁할 때마다 차비와 간식비까지 다 줘가며 눈치를 보며 부탁해야 했다. 부탁하는 처지에 어쩌다 한번 짜증이 나서 뭐라고 하게 되면
"지가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준 건 생각도 안 하네? 터진 입이라고 막말하는 것 좀 봐? 뇌가 없나?"
라는 날선말이 돌아왔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무너졌다. 내가 정말 간절해서 요청한 일이 단숨에 ‘예의 없는 요구’로 바뀌었고, 나의 필요는 그들에게는 ‘부족한 태도’로만 해석되었다. 결국 나는 그날도 다시 혼자 움직였고, 혼자 아이를 챙겼으며, 그날의 감정은 또다시 목구멍 어딘가에 묻어두어야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던 어느 날, 나는 내 감정을 고백하려 했다. 지금의 구조가 너무 힘들다고, 나는 아이와 좀 더 함께 있고 싶다고, 내 의사 없이 돌봄이 결정되는 게 너무 숨 막힌다고. 그러나 말은 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또다시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라는 말이 돌아올 것이고, 결국 나는 또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거라는 걸.
아이를 낳은 후 단 둘이 살아본 시간은 단 한 달 뿐이었다. 그것도 아이가 다 커서 중1 때 해외로 유학을 와서 정착 초기에 잠시 함께한 시간. 그 한 달 외에는 그들이 또 여기까지 따라와서 사는 바람에 아이와 내가 이곳에서 함께할 수 있는 추억도, 시간도 없었다. 학원을 가면 따라가고, 학교를 가면 따라가고, 친구 집에 놀러 가도 따라가니 이젠 친구들의 엄마들이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니... 한두 번이지... 그분들은 혹시 일이 없나요? 왜 그렇게 아이 하는 일에 다 따라다니나요? 00 엄마는 답답하지 않아요? 항상 볼 때마다 가족들과 있는데,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아요... 그냥 내 기분 탓일까요?"
이런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하니, 이젠 누군가를 지나가다가 만나는 것조차 피하게 됐다. 그들은 스스로를 ‘도와주는 존재’로 생각했지만, 나는 점점 더 ‘엄마’라는 내 자리를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누가 아이의 간식을 챙기고, 누가 아이의 하루를 듣고, 누가 아이를 다독이는지를 보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와 시간을 쌓는 건 늘 제한적이었다.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자리는 점점 더 흐려졌고, 결국 나는 엄마이면서도 엄마로 살지 못했다. 그게 지금의 나를 가장 아프게 한다. 원했던 방식이 아니었다. 나는 분명히 아이와 함께 있고 싶었고, 아이와만의 루틴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 선택권은 내게 없었고,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그 권한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렇게 반복된 감정들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어느새 나는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사슬에 묶인 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아이를 더 돌보지 못해 미안했고, 엄마와 동생에게 고맙다는 말을 충분히 하지 못해 또 미안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삶 전체를 '미안함'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의 눈빛은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면 물러서는 어깨,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는 입술, 말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할 때면, 나는 아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너무도 선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건 내게 다시 묻는 질문이었다.
“정말 이 구조가 건강한 걸까?”,
“나는 지금 제대로 된 보호자인가?”,
“아이는 나를 진짜 엄마로 느끼고 있을까?”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죄책감을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엄마로서 아이를 돌보고 싶은 사람이고,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진짜 나로 존재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에게도 설명하거나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내 삶의 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