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착한 아이는 왜 분노를 감추는가

by 류하정

착한 사람이라는 말은 참 달콤했다.

어릴 적부터 나는 그 말에 취해 살았다. 누군가가 “넌 정말 착하구나”라고 말해주면, 그것은 마치 내가 잘 살고 있다는 확신이었고,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웃었고, 더욱 착해지기 위해 나 자신을 조이는 습관이 들었다. 칭찬이란 이름의 이 달콤한 말은 어린 나를 자라게 했지만, 동시에 나를 고장 내기 시작했다. 엄마가 되고, 가장이 되고, 집 안의 크고 작은 책임을 도맡게 되면서부터, 그 착함은 더 이상 나를 보호하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침묵하게 만들고, 참게 만들고, 결국엔 무너뜨리는 족쇄가 되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착한 사람이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크고 작은 갈등이 생길까 두려워 항상 말끝을 조심했고, 어른들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내 감정을 감추는 법을 일찌감치 익혀야만 했다. 무언가 부당하다고 느껴도 “괜찮아”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넘겼고, 억울함이 치밀어도 눈물을 삼켜가며 나 자신을 다독여야 했다. 그렇게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오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단 한마디, ‘싫어요’조차 꺼내는 것이 무서울 만큼, 내 감정에 솔직해지는 일이 낯설고 두려워졌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더욱 짙어졌다.


가족 사이에서도 나는 항상 ‘괜찮은 사람’이었다. 누군가 무리한 부탁을 해도 “내가 하면 되지”라며 받아들였고, 반복되는 불편한 상황 앞에서도 ‘이쯤은 참자’며 마음을 누르곤 했다. 나는 내 감정을 숨기고, 갈등을 피하고, 대신 평화를 택했다. 내가 조금 더 희생하고, 내가 조금 더 맞춰주면, 이 관계가 덜 어긋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내 착함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왜곡되어, 어느새 '편리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고, 나는 점점 나 자신을 잃어갔다.


함께 외출이라도 하는 날이면, 엄마와 동생은 아이를 봐준다는 명목 아래 웃고 떠들며 자리에 앉아 있었고, 나는 그 틈에서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을 받아오고, 흘린 국물이나 물티슈를 닦고, 다 먹은 그릇들을 정리하며 사람들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다. 식사는 늘 내가 제일 늦게 시작했고, 가장 먼저 일어나 정리해야 했다. 다 같이 먹는 식사지만, 나는 항상 일하듯 움직였고, 식사라는 행위조차 나에겐 '대접받는 시간'이 아닌 '돌보는 일'의 연장이었다.


운전도 당연히 내 몫이었다. 차를 몰고 도착하면 시동을 끄기도 전에 엄마는 이미 문을 열고 나갔고, 동생은 트렁크 앞에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들의 성급한 성격을 내가 맞춰야 하는 일이었고, 무선키를 들고 앞장서서 문을 열어줘야 했으며, 덥다고 하면 나는 추운 몸을 부여안고 에어컨을 세게 틀어야 했다. 내가 느끼는 온도, 내가 원하는 속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항상 그들의 편의와 기분, 그리고 타이밍이었다. 나는 마치 이 집안의 매니저 같았고, 스스로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어디 놀러 가자는 이야기가 나와도 나는 설레기보다는 먼저 은행 앱을 켜고 잔고를 확인해야 했다. 그동안 간식이든 밥값이든 외출 비용이든 대부분 내가 부담해왔기 때문이다. 그 모든 ‘작은 비용’들이 쌓이고 쌓여 나를 점점 더 궁지로 몰고 가는 줄도 모르고, 나는 스스로 ‘가정부’이자 ‘기사’가 되어갔다.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았고, 누구도 나의 부담을 줄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를 봐주는 대신 생활비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묘한 분위기가 나를 짓눌렀고, 나는 말없이 그 구조에 복무했다.


가끔은 내가 밥을 사며 눈치를 보았다.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입장이 된 듯한 착각 속에서, 돈을 내면서도 작아져야 했다. 일 끝내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도, 나에게 주어지는 건 휴식이 아닌 또 다른 책임들이었고, 그것들을 감당하며 웃는 얼굴로 간식비와 교통비를 챙겨주는 나는 속으로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아이 밥 해주러 왔다’던 그들은 실제로는 배달음식이나 외식을 더 선호했고, 남편이 “음식이 좀 남았네”라고 말하면, “지가 돈 냈냐? 웃기네”라며 비웃는 듯한 말이 돌아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어느 순간부터 남편은 집 안에서 말수가 줄어들었다. 동생은 늘 아이 옆에 바짝 붙어 있었고, 나는 엄마이면서도 아이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엄마는 일하니까 우리가 놀아줄게.” 그 말은 분명 도와주는 말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네 자리는 없어”라는 기류가 있었고, 나는 점점 더 이 집 안에서 비켜서게 되었다.


가족 외의 관계에서도 나는 ‘착한 딸’, ‘잘하는 딸’, ‘헌신적인 딸’의 역할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엄마는 사람들 앞에서 웃으며 “우리 딸들은 착하고 예뻐요, 큰딸은 든든하고 둘째는 사랑스럽죠”라고 말했고, 나는 그 옆에서 늘 무표정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속은 이미 오래전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었지만, 그 속내를 드러내는 순간 무언가 더 큰 게 무너질까 두려워 말하지 못했다.


내 차는 그들이 편하게 타고 다니는 수단이 되었고, 내 옷장은 그들의 ‘쇼핑장’이 되었다. “이거 안 입잖아”, “정리 좀 해”, “곰팡이 생기겠어.” 그런 말들에 내가 아끼던 실크 원피스와 비싼 가방들이 하나둘 사라졌고, 나는 입던 옷만 돌려입게 되었다. “역시 너는 그 옷만 입지. 대신 새 옷들은 우리한테 오니까 좋네”라며 웃는 그들의 말에, 나는 더 이상 어떤 감정도 표현할 수 없었다.


정작 내가 “이거 담보로 대출이라도 받아야 할까…”라고 입을 떼면, 돌아오는 건 “그걸 왜 네가 써? 다른 방법을 찾아봐”라는 비난이었다. 나는 그들의 생계를 위해 대출을 알아보고, 더 많은 글을 쓰고, 더 많은 강의를 준비하며, 더 일해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돈 없다는 말 좀 하지 마. 글 더 쓰고, 강의 더 하고, 뭐라도 해.” 그 말 속에 나는 매일 조금씩 무너져갔다.


해외에 나온 이후, 그들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내가 쓴 돈만 3개월에 500만 원이 넘는다. 원래는 아이와 함께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아껴두었던 돈이었지만, 그 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누구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니 동생도 알바하잖아. 지금은 자리 잡는 시기니까, 돈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는 말이 돌아왔고, 나는 도대체 왜 내 가정만이 아니라 친정까지 부양하고 있는지, 그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이제 나는 조금씩 깨닫고 있다. 나는 스스로 착한 사람이 되기를 선택한 게 아니었다. 착하지 않으면 버려질까 봐, 사랑받지 못할까 봐, 무의식적으로 감정과 권리를 포기한 채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나를 점점 더 ‘당연한 존재’로 만들었다. 나는 ‘감정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기능이 있는 도구’처럼 여겨졌고, 그렇게 살아온 시간들이 쌓이며 나는 점점 사라져갔다.


이제는 그런 나를 벗어나려 한다. 아직도 쉽지는 않다. ‘싫어요’라는 말 한 마디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말한 뒤에는 죄책감이 밀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 연습이, 이 다짐이, 이 저항이 결국은 나를 살릴 것이라는 걸.


착한 사람이라는 껍데기를 벗고, 진짜 나로 살아가려는 지금,
이 고통스러운 시작이 바로 내 인생의 진짜 첫 페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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