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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Soo Feb 13. 2022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인생 성찰기

아직 반백년을 채 못살았지만, 그동안 주변의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나는 참 굴곡 많은 인생을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남들이 대학 졸업 후 돈을 벌기 시작할 때 다시 대학에 입학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릴 때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고... 그럴 때 마다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었다. 

30대 후반에서 40대로 넘어가면서 점점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 열심히 돈 모아 때 되면 결혼하고 아이 낳아 기르고 가정을 꾸려가는 이들을 보면서 난 왜 그러지 못했을까하며  부러워 했었다.

왜 그땐 그렇게 사는 것만이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싶다.


그래서 어쩌면 그 열에 합류하기 위해 결혼을 해야 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앞만 보고 살았었던 것 같다. 

막상 짧았던 결혼생활이었지만 그동안 내가 꿈꿔오고 생각해왔던 결혼 생활과는  너무나도 많이 달랐다. (현실이란 말이지..)

아마도 드라마나 주변의 겉모습만 보면서 어쩌면 애써 안 좋은 모습은 보려 하지 않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좋은 모습만을 찾고 타당한 이유를 대려고 노력하지 않았었나 싶다.




'그해 우리는'이란 드라마를 보다 우연히 하나의 대사가 내 귀에 쏙 박혔다.

"너도 네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봐야 되지 않겠어?"

 

똑같은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보았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왔나? '

'나는 어떤 인생을 살기 위한 선택을 했었을까? '


머리가 좀 크고 나서부터 어떤 인생의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에 나는 나 자신을 위한 결정을 해왔던 것 같다. 어찌 보면 가족도 친구도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원하는 것만을 추구했었다. 


20,30대 그 당시 주변의 선배나 지인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해줬었다.

'너 인생이니까 너를 위한 결정을 해. 결국 너 인생 네가 사는 거야.' 

그런 말들을 들으며 그렇게 그 순간 최선을 다한 선택을 하고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생각해왔다.

아니다. 그렇게 믿고 싶었었나 보다.


요즘 나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정말로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살았을까?'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하던 중이어서 그 대사가 더 귀에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결혼과 이혼이라는 인생의 큰 산을 넘어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직 그 산을 다 내려왔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언제쯤 다시 평평한 땅에 발을 내 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때론 운전을 하다 귓가에 들려오는 노랫말에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아련함으로 가슴 시림으로 꿈을 꾸었던 것처럼 다가올 때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혼 후에 달라진 점들이 있다면  다른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족과 친구들의 소중함을 다시 깨달았고, 내 인생의 나는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내 이야기를 하며 도움을 요청했을 때 내 손을 잡아주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진심으로 내 곁에 있어준 이들이 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얼마 전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앞으로 어떻게 남은 생을 살아갈까 고민하던 날,,,

문득 정말로 죽을힘을 다해 살지 않았던 과거의 나를 돌아보며 후회와 반성을 하며 눈물이 난 적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내가 손 잡아 줄 테니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손을 잡아 주는 것 밖에 없다며 따뜻한 손을 내미는 이가 곁에 있다는 것이 참 기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곁에 마음을 함께 나누고 기댈 수 있는 누군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크나큰 힘이 된다는 걸 다시 또 깨달아 가는 중이다.

그런 이가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연인일 수도 있다. 

어찌 보면 그것이 인생 헛 산건 아니다고 말할 수 있는 반증이 되지는 않을까라고 스스로 위안도 해본다.


문득 지금 나는 혼자야란 생각이 든다면 곰곰이 한번 주변을 다시 돌아보면 좋겠다.

분명 지나온 길을 되짚어가다 보면 그 순간에 누군가 옆에 있었고 나는 혼자가 아녔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험난했던 그 시간들을 헤쳐나가고 얼굴에 다시 웃음 꽃이 피는 걸 숨죽이며 바라보고 기다려준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40대를 불혹이라 하고 50대를 지천명이라고 한다. 그 의미를 알아가며 살다 보면 내가 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인생의 어떤 조그만 의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지천명을 몇 년 앞둔 지금..

어쩌면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더 길지도 모를 지금..

지나온 삶을, 나 자신을 돌아보고 이제는 나뿐 아니라 주변이들과 더불어 함께 잘 살아가는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

물론 바쁘게 각자 살아가다 보면 소홀해질 수 도 있겠지만  어쩌다 가끔이라도 그들에게 안부인사를 전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따뜻함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야겠다.


'타인 지향적인 삶' 그런 인생의 목표를 가져 보는 것도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 사회에서  나쁘지 만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불혹(不惑)

40세를 부르는 말이다. 논어 위정(爲政) 편의 문구에서 유래하였다.
불혹은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공자는 《논어》 자한(子罕) 편에서 당대 인격적 이상인 군자(君子)의 덕목으로 "어진 사람은 근심이 없고(仁者不憂 인자불우), 지혜로운 사람은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며(知者不惑),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勇者不懼)"고 제시한 바 있다.
지천명 (知天命)

하늘의 명을 알았다는 뜻으로, 나이 50세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논어 위정편에서 공자가 나이쉰에 하늘의 명(천명)을 알았다고 하여 유래된 말로 여기서 천명이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가리키는 유교 정치사상을 말한다.

공자가 다음과 같이 회고하기를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于學),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三十而立),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고(四十而不惑),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으며(五十而知天命),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되었고(六十而耳順), 일흔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지천명은 위의 글 '五十而知天命' 에서 딴 것이다.
여기서 '천명을 안다'는 것은 하늘의 뜻을 알아 그에 순응하거나 하늘이 부여한 최선의 원리를 안다는 뜻이며, 마흔까지는 주관적 세계에 머물렀으나 50세가 되면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세계인 성인(聖人)의 경지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 출처 : 위키 백과,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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