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청렴과 내 현실의 충돌

2008년 한전 윤리경영 수기 최우수

by 헤세Hesse

11월 4일 오후 '○○○321R6L1' 전주 앞에 섰다. 2008년 4월말에 신입사원으로 ○○지점에 발령받아 담당 업무 중의 하나로 고압 방문검침과 영업일반 현장조사를 반복 실시하다 보니 이제는 내비게이션 없이도 현장을 찾아가는 데 어려움이 많이 줄었다. 하지만, 오늘은 전주를 찾은 것만으로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현장에는 단순종변이나 계약전력 정상화를 요청한 고객도 없었고, 그렇다고 검침할 계량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지금 검침사업소 송대리님으로부터 무단사용 위약을 제보받아 현장조사를 나온 것이었다. 완공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공중화장실이었다. 외관도 깔끔하고 화장실에 들어서자 어디에선가 클래식 음악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가공 인입구 접속점만 보일 뿐 계량기는 부설되어 있지 않았다. 누군가 직선 연결한 것이 분명했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일단 현장에서 철수했다.

* 직선 연결 : 전기사용신청 없이 전주에서 임의로 연결 후, 요금을 납부하지 않고 전기를 사용하는 것. 도전


지점에 돌아와 영업정보시스템을 검색했다. '12선녀탕', '공중화장실'... 찾았다! 신규 접수고객이었다. 부담금 납부도 안 된 상태에서 당연히 계량기는 출고될 리 없고, 해당 내선공사업체에서 직선 연결했으리라. 고객명 ○○군수, 신규 신청한 내선공사업체는 A회사였다.


A회사와 나는 인연이라면 인연이 깊었다. 내가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되던 지난 5월, 백담사 입구에 직선 연결한 고객이 있었다. 영업정보시스템 위약 처리 방법조차 미숙했던 당시의 나는 지사에 여러 차례 문의를 해서 진행을 하였다. 그런 나에게 팀장님은 상반기 청렴도 조사기간이고, 당신께서 직접 전업사 사장과 통화를 할 테니 권고조치로 마무리하자고 하셨다. 그게 나의 첫 위약업무였고, 그때의 내선공사업체가 A회사였다.


2008년 7월 지사 종합감사 결과, 임시전력 사용 용도가 종료된 임시전력 고객에 대해 상시전력으로 전환토록 미안내하여 감사지적을 받았다. 나는 후속조치로 임시전력 해지 또는 상시 전환 요청 공문을 고객별로 발송하였다. 하지만, 임시전력을 해지하지도 상시 전환하지도 않은 한 고객이 있었고, 부득이 전기공급 중지할 수밖에 없음을 안내하였다. 고객은 이미 오래전에 내선공사업체에 상시전력 신청 의뢰를 하고 공사비까지 전달하였으나 전업사 사장이 처리를 지연하고 있다며 하소연했다. 전업사 명의를 물어보니, A회사라고 했다.


물론 고객과 전업사 사이의 진행상황이 어찌 되었건 지점으로 상시전력 전환 접수가 되지 않았고 등기 발송한 안내문대로 충분히 전기공급을 중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고객을 대신해 A회사 사장에게 전화했다. 고객으로부터 의뢰를 받고 공사비까지 받은 지 한 달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대 공사건으로 접수를 미처 못했다는 변명이 쉽게 수긍되지는 않았으나 조속한 접수를 부탁했다. 더불어 지난 5월 백담사 직선 연결과 관련하여 10월, 11월이 본사 주관 위약 일제조사 기간이어서 이번에 재차 적발 시 반드시 위약처리됨을 안내하고 직선 연결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A회사는 이번에 공중화장실을 또다시 직선 연결했고, 위약 담당자인 나에게 적발된 것이다. A회사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위약 처리는 고객과의 문제지만, 나는 내심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원했는지 모른다. 사장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거 신규신청했다고, 계량기 출고되는 대로 부설할 것이라고 그러면 된다고 했다. 부담금 수납도 안 된 상태에서 계량기 출고가 언제 되냐며, 그리고 화장실 관리자의 말에 따르면 신규신청도 하기 전에 이미 직선 연결하지 않으셨냐는 내 말에 사장은 한껏 소리를 높였다. 군청에서 화장실을 완공했는데 관광객들이 한꺼번에 몰려서 민원을 우려해 그렇게 한 거니까 그렇게 알면 된다고, 길게 얘기할 필요 없다며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A회사와는 더 이상 진행할 사안이 없다고 판단한 나는 늦은 오후 ○○군청으로 향했다. 다행이었다. 담당자가 문화관광과 계장님이었다. 입사 후 첫 근무지인 이 곳에서 만나 교제를 시작하게 된 여자친구 아버지가 경제도시과 계장님으로 계신 것이 왠지 마음에 걸렸지만, 경제도시과를 그대로 지나쳐 문화관광과로 향했다. 담당자는 잘못을 인정했고, 나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나는 위약금 납부를 부탁하고 다소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왔다.


퇴근시간이 다 되어 지점으로 돌아왔다. 하반기 청렴도 조사와 관련하여 업무를 전담하다시피 해오신 전력공급팀 과장님이 내려오시더니 사장이 본인에게 전화를 걸어왔었다며 A회사 위약 처리건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전했다. 완곡하게 표현하시기는 했지만, 팀장님과 다른 팀원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내가 마치 청렴도 저해자쯤으로 여겨지는 것 같아 순간 울컥했다. 나는 그날 밤 '국민권익위원회 사이버 청렴교육'에서 다만 당연한 것이라고만 생각한 그 '청렴'과 내 '현실'의 충돌에 대해 처음으로 고민해 봤다. 뭔가 내가 업무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은 찝집한 느낌이 있었지만 나는 누구한테 잘못하지도 않았고, 특히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하반기 청렴도 조사가 12월에 실시된다. 나는 신규신청 분야 청렴도 조사 대상인 A회사에 대해 지사 전략경영실 감사파트와 협의했다. 이에 대해 청렴도 조사를 빌미로 정당한 업무수행에 심각하게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 입증자료가 확실하고 사유가 타당하다면 본사 감사실로 제출하여 조사대상에서 제외 예정임을 전해왔다.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청렴도 조사를 운운하던 그 사장님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리고, 그 사람 앞에서 옳은 것에 대해 그리고 그른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던 나의 모습을, 지금의 나를, 나는 절대 잊지 않고,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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