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합니다.”
내 생활기록부에 늘 적혀있던 말이다.
해석하자면 선생님을 귀찮게 하지 않고, 눈치가 빠르고, 준비물을 잘 가져온다는 소리.
내가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챙겨주지 않는 책가방, 나라도 챙겨야 했다.
부모님은 장사를 접고 ‘자식 먹여 살리겠다며’
또 다른 일을 찾아 나섰다.
손재주가 좋았던 아빠는 목수가 되어
건설 현장을 전전했고,
엄마는 막내를 조금 키우다
할머니에게 SOS를 치고, 학교 급식실에 취직했다.
급식이란 게 막 생길 무렵이었다.
밀레니얼 시대를 맞이하며 도입된
하나의 혁명 같은 것.
‘급식’은 엄마들을 도시락 싸기에서 해방시켰다.
우리 엄마만 빼고.
우리 엄마는 이제 자식들 도시락 대신
남의 자식들 입에 들어갈 밥을 지어야 했다.
저녁은 엄마가 아깝다며 싸 온 반찬들과,
국으로 대신했다.
변주가 있긴 했지만,
초등학교 급식 메뉴라는 게 뭐 얼마나 다르겠는가.
미트볼, 생선까스, 카레? 일에 지친 엄마는
우리에게 알아서 먹을 만큼 덜어 먹으라며
씻으러 들어가곤 했다. 집에서 먹을 뿐,
저녁도 급식이었다.
아빠는 술을 마시는 일이 잦아졌다.
어른들은 그 일이 그렇다고들 했다.
술을 마시면 아빠는 엄마가 차린 ‘급식’
저녁상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고,
심한 날은 반찬들을 싱크대에 부어버리기도 했다. 엄마가 일하는 게 못마땅한 건지,
스스로가 한심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불편했는데,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가 점점 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분위기가 좋은 날은,
내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었다.
아빠는 가방끈이 짧았지만,
자식들이 공부를 잘했으면 했다.
‘너희는 책상머리에서 일해라.’
어떻게 하면, 책상머리에서 일할 수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아빠가 퇴근하면 TV를 끄고 책상으로 달려가 책을 읽는 모습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성적표는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퍼포먼스였다.
1이나 2가 적힌 종이 한 장만 있으면 나는 모든 잔소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아니, 그럴 줄 알았다.
해가 지나가면서 또 다른 잔소리가 나를 흔들었다. “너는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
단정한 머리에 손댄 곳 없는 교복,
수업을 곧잘 따라가던 내게 어른들은
다짜고짜 선생님이 되라고들 했다.
부모님도 그랬으면 하는 눈치였다.
‘교대’에 가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면,
험한 꼴 볼 일도 없고(?) 여자로서
그만한 인생이 없다고 했다.
편하게 살 수 있다고 했다.
나를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지켜봤을 부모님도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나는 두 남동생을 지도하고
숙제를 봐주는 일에 이골이 나 있었다.
평생 누굴 ‘가르치며’ 살아야 한다니, 어림도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비평준화 동네여서 고입 시험까지 치르고 들어간 고등학교는 지역 명문이었다.
날고 긴다는 아이들을 모아놓으니 나는 가까스로 중간만 가는 학생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됐으니, 속은 쓰렸지만, 어깨는 가벼웠다.
이제 아무도 내게 ‘선생님’이 되라고 하지 않았다.
이 무렵, 부모님은 다툼이 잦아졌다.
왜 싸우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너무 큰 소리로 싸워제끼는 통에
나와 동생들도 다 알게 됐다.
아빠는 ‘그깟 돈 몇 푼 벌겠다고 애들을 돌보지 않는다며’ 엄마를 몰아세웠고,
엄마는 ‘나라도 벌지 않으면 학원비는 누가 대냐며’ 맞받아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닌데, 표면적으로는 우리 때문에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참전했다.
“이럴 거면 왜 애를 셋이나 낳았어?
누가 낳아 달랬어?”
드라마 속에서만 보던 풍비박산 난
집안 풍경이 내 눈 앞에 펼쳐지고,
마침내 엄마가 가출을 감행했다.
초등학생인 막내는 불안에 떨었고,
나는 학교에 결석했다.
보름이 지나 집에 돌아온 엄마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빠는 우리를 모두 불러놓고
“이혼할 테니, 누구랑 살지 정하라.”고 했다.
분노로 가득 차 어떤 말로 상처를 줄 수 있을까
말을 고르던 찰나, 과묵한 둘째가 입을 열었다.
“누나랑 살래.”
막내도 말했다. “나도....” 끝으로 내가 말했다.
“엄마, 아빠랑 살고 싶지 않아.
내가 애들 데리고 살게.”
이 말이 부모님에게 어떻게 들렸는지는 모르겠다.
기억나는 건 온 가족이 밤새도록 울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날 이후,
마치 모래 위에 써 둔 글자를 파도가 지우듯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됐다는 것뿐.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부모가 세상의 풍파에 맞서
기댈 수 있는 언덕이라는 믿음도 함께 지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