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 사회

by 롸잇테리언



내가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낸 소도시엔 공장이 많았다. 일명, 블루칼라들의 도시. 우리 집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집들이 맞벌이를 했고, 공단으로 출퇴근하는 사람이 많았다. 비학군지라고 해도 학원가는 성행했다. 부모들은 하루 종일 기계를 만져 번 돈으로, 자식들만은 책상머리에 앉혀 보겠다며 학원비를 꼬박꼬박 냈다. 우리 집도 다를 건 없었다. 고만고만한 살림끼리 뭘 나누었겠나 싶겠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철저하게 계급의 층위를 가졌다. 은행원, 교사, 공무원처럼 공장 작업복을 입지 않는 집과 나처럼 노동자 계급의 가정, 그리고 가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어려운 위태로운 집들이 그랬다. 아빠는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다. 아빠 말에 의하면, 목수는 ‘노동자’가 아니라 ‘기술자’였다. 하지만, 어린 나는 지저분한 작업복 차림으로 승용차가 아닌 봉고차를 타고 다니는 아빠에게 특별한 ‘기술’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차라리 공장 작업복을 입고 다니는 옆집 친구 아빠가 더 좋아 보였다. 그럼, 괜히 튀지라도 않으니까.


계급은 학원 내에도 존재했다. 내가 다니던 S 학원은 매월 월말고사를 통해 반을 바꿨다. 시험을 잘 치면 S반, 그다음은 A, B, C, D 순이었다. 나만 잘하면 승격이 가능한 계급이었다. 기를 쓰고 매월 S반에 이름을 올리는 건, 나의 희망이고 한 줄기 빛이었다. 나는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반장이었다. 내 힘으로 가질 수 있는 가장 빛나는 왕관. 연년생인 동생은 달랐다. 늘 C 아니면 D. 계급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전기세 내주러 가방 들고 왔다 가기만 하는 학생의 전형이었다. 그래도 부모님은 꾸역꾸역 동생을 학원에 밀어 넣었다. 남자애를 학원까지 안 보내면 질 나쁜 애들하고 어울릴 거라고 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였다. 학원에도 일진은 있었으니까. 물론, 선을 넘지 않는 정도의 일진.


어느 날, 밤에 집에 가니 동네 아줌마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엄마가 ‘동재’라는 아이를 아냐고 물었다. 같은 반이니까 아는 건가. 말 한번 섞어보지 못한 사이인데. “걔가 오토바이 훔치다 걸려서 난리 났다며?” 작은 동네는 소문이 빨랐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그 아이에게 지금 엄마가 없고, 아빠는 집에서 잠만 자고 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줌마들은 연신 “그럴 거면 왜 낳았대~”를 연발하며 혀를 찼다. 방문을 닫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동재는 늘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준비물을 안 가져와 손바닥을 맞는 단골 무리에도 항상 껴 있었다. 마치 사물함 위에 있는 시든 화분처럼, 별다른 존재감 없이 자리를 채우는 아이. 그게 동재였다. 부모가 사랑하지 않는 아이는 그 누구의 사랑도, 관심도 받을 수 없는 걸까. 사랑하지 않을 거라면, 왜 낳아서 천덕꾸러기 같은 삶을 살게 하는 걸까.


중학생 시절에는 버디버디라는 메신저가 유행했다. 한 반이 되면, 1분단부터 쭉 종이를 돌려 서로의 아이디를 적고 게시판에 꽂아 공유하던 때. 자기 전에 잠깐 접속한 버디버디에서 스크롤을 쭉쭉 내리다, 이동재를 발견했다. 호기심에 쪽지를 보냈다. “너 어디야?” 잠시 후, 답장이 왔다. “피시방.” 오토바이를 훔쳐 학교를 뒤집어놓고도 태연하게 피시방이라니. 지금은 청소년 출입 금지 시간이라고. 답장을 보내려다 그만두었다. 동재는 교내 봉사와 정학 처분을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등교했다. 동재는 이제 공식적인 ‘문제아’가 되었다. 담임 선생님은 날 불러 동재와 짝꿍이 되어 그 아이를 ‘잘 챙겨주라고’ 했다. ‘제가 왜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 했지만,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이 아이와 2년 내내 같은 반이 되고, 짝꿍이 되면서, 나는 동재가 내 생각보다 악하지 않음에 안도했다. 미술 시간에는 물통을 나누어 쓰고, 한자 시간에는 내가 안 쓰는 붓을 쥐여주니 동재도 손바닥 맞는 일이 줄어들었다. 화이트데이라며 가져온 사탕을 보고 “훔친 거 아니지?”라고 도끼눈을 떠도 “아니야~”하며 실실 웃는 모습을 믿게 됐다. “넌 엄마 안 보고 싶어?” 무례한 질문을 해도 동재는 “얼굴도 모르는데 뭘”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뭐가 이렇게 괜찮아. 동재와 2년간 짝꿍을 하면서 나는 부모에게도 점수를 매길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태어나자마자 계급이 정해지고, 그걸 뒤엎을 치트 키조차 없는 건 너무 가혹하잖아.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던 동재와 모범생이었던 나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에 각각 진학하게 됐다. ‘똥통고’라고 불리던 다른 시의 상고로 진학하면서 동재는 내게 “반장. 공부 열심히 해서 텔레비전에 나와라~”라는 장난기 가득한 롤링 페이퍼를 남겼다. 그렇게 끝이었다. 다시는 그 아이가 궁금해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년 뒤, 평범하게 살려고 노력했던 우리 집이 일순간에 풍비박산 나면서 나는 동재를 종종, 자주 떠올렸다.

작가의 이전글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