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아기 때 얼굴 그대로다. 20년이 어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연신 내 손을 붙들고 잘 살아야 한다,고 했다. 다섯 살 때부터 나를 봐 온 아줌마들이 웨딩드레스 입은 나를 보고 눈시울을 붉히는 건,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남편과 나는 손을 잡고 씩씩하게 입장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돌아가신 아빠의 자리를 일 년에 한 번도 보기 힘든 삼촌이 대신하는 것도 어딘가 억지스러웠다. 내가 결혼을 결심한 건, 당연히 그를 사랑해서였지만 비빌 언덕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군대를 갓 전역한 둘째와, 아직 고등학생인 막냇동생까지 내겐 책임져야 할 식구들이 있었고 나 혼자 책임지기에는 능력이 부족했다. 평범하지만 번듯한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그는, 슬프지만, 다정한 눈빛으로 내게 청혼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다. 스물다섯 살의 신부는 순진한 얼굴로 그 누구보다 전략적 선택을 했다.
그즈음에는 3포세대라는 말이 뉴스를 휩쓸었다. 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났다는 신조어였는데, 나는 젊음 하나로 취업과 결혼까지 빠르게 통과한 셈이었다. 불기운이 강한 사주라더니, 불구덩이 속에서도 어쨌든 컴포트존에 발을 밀어 넣고야 마는구나. 다행이야. 결혼생활은 생각보다 더 안락했다. 소문난 오리탕 맛집 위에 있어 툭하면 벌레가 나오던 자취방을 벗어나, 작지만, 깨끗한 아파트에 입성했다. 새벽까지 회의가 이어져도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든든했고, 당장 이 팀에서 ‘아웃’되더라도 굶을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은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 나는 여전히 엄마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비빌 자식’이었고, 동생들은 각각 전문대 복학생, 지방대 신입생이었다. 언젠가 패널로 나온 정신의학과 전문의 선생님에 말에 따르면, ‘결혼은 독립을 의미하며, 원가족과의 건강한 분리가 필요하다.’ 독립도, 건강한 분리도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겐 엄마와 함께 갚아야 할 빚이 있었고, 돌아가신 아빠가 부탁한 대로 동생들을 멀쩡한 사회인으로 만들 책임이 있었다. 가끔 속 모르는 친구들이 ‘넌 걱정 없겠다.’라는 말을 건네면 커피잔으로 눈을 떨구긴 했지만, 나는 그들을 사랑했다. 온 가족이 흔들리던 시절, 공장에서 3교대를 하면서도 나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던 엄마와 시궁창 같았던 시간을 함께 지나온 동생들이었다. 가능하다면, 그들의 손을 잡고 내 옆으로 끌어올려 주고 싶었다. 사려 깊은 남편의 배려 덕분에 나는 돈도, 마음도 아낌없이 친정과 나눴다.
결혼 1주년이 막 지났을 즈음, 엄마는 대뜸 내게 물었다. “애는 언제 낳을거니?” 말문이 막혔다. 본격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기도 했지만, 지금 내가 애를 낳는다는 게 뭘 의미하는 건지 아는 것일까 반문하고 싶었다.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엄마는 내게 같은 질문을 했다. 시댁에서 주는 눈치도 만만치 않은데 엄마까지 왜 이럴까. 엄마의 대답은 가히 걸작이었다. “사돈어른 눈치가 보여서 그래.” 이게 5060 베이비 붐 세대 엄마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애는 눈치가 보여서 낳고 말고 하는 게 아니라고. 효녀 노릇 하느라 애써 눌러왔던 반골 기질이 고개를 슬금슬금 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