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되서부터 나는 사실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을 느꼈다. 나는 주어진 일을 따라가기에만 급급하고 정작 새로운 일들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주로 헤드쿼터가 있는 싱가포르 지사 사람들과 같이 일했는데 그 사람들은 정말 일을 열심히, 잘했다. 퇴근하고 집 근처를 걸으면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서 징징댔다.
나: 그러니까, 싱가포르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일을 열심히 해. 퇴근 시간이 지나도 그 사람들은 계속 일하고 있고 (메신저가 늘 On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나랑 같이 일하는 그 디렉터는 저녁 10시에도 이메일을 뒤지면서 혹시라도 놓친 게 있는지 확인한다니까!
엄마: 그러면 그 사람들은 돈을 더 많이 받겠지. 넌 아직 일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잖아.
나: 그리고 다들 엄청 똑똑해. 내가 제일 멍청한 것 같아. 내 상사는 난양공대 나오고 일할 때도 엄청 똑똑하다? 그리고 나랑 같이 일하는 그 디렉터는 싱가포르국립대학 나오고 BBC에서 일했었어! 일할 때 진짜 프로페셔널 해. 엉엉.. 나 어떻게 일해 진짜..
엄마: 어이구.. 괜찮아. 너도 1년만 지나면 그렇게 될 수 있어.
나: 나 맨날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데 하나도 모른다니까.
엄마: 시간이 지나면 다 할 수 있어
나: .......
겉으로는 잘 지내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매일 야근을 해야만 그래도 일을 따라갈 수 있었다. 어느 날, 친한 언니(이하 백설공주 언니)가 퇴근하고 일본계 마케팅 대행사 사장을 만나기로 했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언니에게 고민 상담을 했다.
나: 사실 나는 싱가포르가 선진국이고 워라벨이 있는 나라인 줄 알았어. 근데 겪어보니까 너무 아시아틱한 일 문화야 정말. 헤드쿼터 사람들 진짜 미친 듯이 일하고 일도 진짜 잘해. 경쟁 진짜 심하고 성과 중심적이고. 워커홀릭들이야.
백설공주언니: 몰랐어? 그렇게 경쟁적이고 미친 듯이 일하니까 지금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된 거지.
나: .............. 이렇게 경쟁적인 줄 몰랐다. 나 맨날 야근하고 남들보다 더 많이 일하는데도 계속 부족함을 느껴.
백설공주언니: 하루에 남들보다 더 많이 일하는 게 잘하는 거야. 남들 3년 일한 거, 나는 1년에 끝낼 수도 있는 거잖아? 얼마나 일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어떤 걸 하고 얼마나 배우고 이런 게 중요한 거지. 5년 일해도 일 안 하는 애들은 그대로다?
나:.. 진짜 좋은 말이다... ㅇㅅㅇ
우리는 택시에서 내려서 펍으로 들어갔다. 일본계 마케팅 회사 사장이 이미 와 있었다. 필리핀 사람이었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면서 얘기를 했다. 그 필리핀 사람(이하 사장)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봤다. 일본 회사에서 외국인을 사장으로 앉힌 건 이 사람이 처음이라고 했다.
사장: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 내 자리는 한쪽 구석 끝이었어. 그러다가 조금씩 조금씩 커지다가 그러다 사장 자리에 앉게 됐어.
백설공주언니: 진짜 대단한 사람이야. 레몬아, 너도 이렇게 될 수 있어.
나: .....................
일 얘기도 하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했다. 그러다 요즘 내가 하고 있는 고민에 대해서 물어봤다.
나: 어떤 클라이언트가 내가 할 수 없는 서비스를 하고 싶어해. 이런 경우는 어떻게 대응해? 사실대로 얘기해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
백설공주언니: 이건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해야지.
사장: 당연하지.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해.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그리고 그 사람한테 맡기면 되는 거야. 솔직할 필요 없어.
백설공주언니: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하고 무조건 잘한다고 해.
나: 그런 거구나.....
사장과 헤어지고 백설공주언니랑 야식으로 라면을 먹고 백설공주언니랑도 헤어졌다.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은 너무 험난하고 경쟁적이고 나는 왠지 이런 경쟁적인 곳이 나랑 맞지 않는다고도 느낀다. 하지만 일은 재밌고 포기하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되게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것만 같고 그에 비하면 나는 너무 수동적으로 일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일에 대한 부담감과 스스로에 대한 자신 없음. 뭔가 답답한 이런 기분. 나약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나는 이런 기분들을 종종 느끼곤 한다. 이런 감정들은 나에게 에너지가 되기도 하고(더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아니면 나를 슬럼프에 빠뜨리기도(이제 끝이야. 나는 이게 다야..라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