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집 삼대일기] 첫 번째 이야기
많은 이들에게 슬픔을 안겨준 2022년 10월은 제게도 가장 잔인한 달이었습니다.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갑자기"라는 표현이 적절했습니다. 특별한 지병이 없으셨던 어머니께서는 예년보다 추운 10월 어느 날 갑작스레 쓰러지셨고, 하필이면 아무도 곁에 없었습니다. 뒤늦게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이송되셨지만,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께 전화로 전해 들은 사실을 장남인 저는 장례식장에서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갑자기 쓰러지셔서..."
인생에는 세 가지 큰 애경사가 있습니다.
탄생-결혼-죽음
어머니의 별고 전, 가장 큰 사건은 제 결혼이었습니다. 결혼식은 신랑, 신부가 주연인 무대입니다. 반면에 죽음의 주인공인 돌아가신 분은 말이 없습니다. 장남인 제 팔에 두 줄의 띠가 둘러졌습니다.
배우라는 표현은 거짓이라기보다는 짧은 시간에 완성해야 하는 무대(예식)라는 공간이라는 표현에서 그리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결혼식 때도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누구를 위한 결혼식인가?
또 이건 누구를 위한 장례식인가?
장례식에서 저는 늘 조연배우였습니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이들의 마음이 어떤지는 솔직히 알 길이 없었습니다. 위로의 말이라고는 "힘내세요" 정도밖에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맞절을 하는 자리가 바뀌었습니다. 그 조연과 주연의 자리가 뒤바뀌고 나니 이제 좀 알겠습니다. 상실감, 비현실감, 죄책감 그리고 책임감의 그 복잡한 심경을요.
중학교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 당시 저는 반장이었습니다. 덕분에 친구들 대표로 담임 선생님과 조문을 하고 친구에게 맞절을 했지만, 저는 그 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친구의 마음이 어떨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불혹이 지난 제 마음은 중학생 남자아이가 되었습니다. 부모 앞에서는 언제나 아이가 된 기분처럼 말이죠. 그리고 동시에 완장을 찬 주연 배우가 되었습니다. 가혹한 완장이었습니다.
조문을 받을 때도, 어머니 입관식 때도 눈물이 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실감이 나질 않았습니다. 잠시 어디에 가신 것만 같았습니다. 어머니 빼고 가족들 모여서 어머니 장례식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부터 그랬습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 거지..?'
영정사진이라는 것을 찍어둔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일찍 그런 게 필요하리라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고향 집 서랍을 쑤셔도 나오지 않더군요. 결국 한 달 전 부모님과의 여행 때 제가 찍어드린 어머니 독사진이 영정사진이 되었습니다.(장례식장에서는 그 사진에 한복도 입혀주고, 배경도 점잖게 바꿔주었습니다.)
가혹한 또 그렇기에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장례식장에서 장남은 해야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이렇습니다. 가까운 친인척들에게 부고를 알립니다. 장례식장이 결정됩니다. 빈소를 지키고, 문상객들의 조문 시 맞절을 하고, 식사 시 말씀을 좀 나눕니다. 여기까지는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앞에 보이지 않는 부분은 이랬습니다. 이성을 요구하는 결정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특실을 할 것인지, 일반실을 할 것인지 정합니다. 당연히 그렇겠지만 준비된 죽음이 아니라면 어디로 모실 것인지 장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저는 남은 가족은 납골당과 수목장을 검토해야 했습니다.
화장을 한다면 유골함을 선택해야 합니다. 디자인부터 가격까지 다양합니다. 솔직히 100만 원이 넘는 도자기 가격에 놀랐지만, 가시는 길에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겨를은 없었습니다. 진공이라 유골이 썩지 않는다는 말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허례허식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자식 입장에서는 평생에 한번 있는 부모님 장례식에 가격비교를 하고 있을 겨를이 없습니다.
어머니 유골함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
인터넷 쇼핑 그리고 가격비교
관도, 수의도, 장례식 꽃장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어머니께서 장지로 가실 때 타실 차도 별도로 계약해야 합니다. 주방, 서빙 도우미 아주머니들을 몇 명을 고용할지, 고기와 떡은 몇 인분을 주문할지까지 챙겨야 합니다.
그 와중에 쓰러지거나 아픈 가족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장례 중에는 잠을 자지 않습니다. 어머니 빈소에 피운 향이 꺼지지 않게 지켜드렸습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부모님 상에 장례문화와 용어들은 어찌나 낯설었는지 모릅니다. 초제, 입관, 발인제, 분향제.. 제 생각에 저뿐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모든 분들 모두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것이 꿈만 같습니다. 정신은 몽롱한데 오른팔에 두 줄짜리 완장이 무엇인지 저에게 슬픔을 느낄 틈을 주지 않습니다. 검은색 옷을 입고 서있는 남자 한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정신 차리고 잘 모시자'
모든 장례절차가 마무리되고 검은색 옷을 벗었습니다. 이제 잠시 빌린 주연 완장도 반납합니다. 손님들이 모두 가고 나와 아버지, 그리고 직계가족들만 남았습니다. 그제야 엉엉 우시는 아버지를 부둥켜 안고, 아무 말 없이 안았습니다. 그리고 시골집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내가 대신 운전을 해주었습니다.
상복도, 완장도, 장례 손님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제야 눈이 녹아 물이 흐릅니다. 눈에서 나오는 물은 멈추지를 않습니다.
소리 내어 울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마음에 한없이 쌓여 있던 눈은 그렇게 녹아내렸습니다.
삼우제를 지내러 다시 어머니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 일기장을 찾았습니다. 살아생전, 그러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써 내려가신 따끈따끈한 일기장입니다. 그리고 다른 서랍에는 어머니께서 제가 초등학교 때 제게 매일 같이 색종이 쪼가리에 써주신 편지가 있었습니다.
"93년 10월 3일"
29년 전 빛바랜 색종이가 세월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군에 갔을 때도 매일 같이 써주신 편지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글을 쓰시는 분이었습니다.
그것들을 읽고 있노라니, 눈이 녹아 나오는 물이 눈물이라면 이제 눈이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행복한 엄마와 말 안 듣는 초등학생 아들의 이야기, 군에 간 아들에 대한 그리움의 이야기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뵀을 때, 어머니께 "내가 글을 쓰고 있다" 고, "조만간 책이 나올 거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안타깝게도 보여드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다음 책은 어머니와 아이들과 함께 쓰는 "꽃집 삼대일기" 어떻냐며 함께 대화를 나눴었습니다. 그 책을 함께 써내려 갈 수는 없지만, 이야기를 남기고 가셨습니다. 저는 글 조각 퍼즐을 맞추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평생 꽃을 사랑하셨던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손자 손녀의 삼대일기 첫 장이자 마지막 장을 썼습니다.
더 사랑하고 표현해야지
처음인 것처럼, 또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순간이 늘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하고 표현하고 손으로 쓰다듬고 눈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한 달 가까이 마음이 공허하여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만히 생각해보았습니다. 결론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고, 그리고 만들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데이터 관련 글도, 출간 노하우도, 에세이도 이야기는 계속되니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