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경문 Dec 10. 2022

12월의 코스모스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이"

[1] 12월의 코스모스

마음이 답답하고 머릿속이 복잡할 때, 어디로 향하는가?


우리 주변에서 몸이 아픈 사람만큼이나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마음은 누구에게나 감기처럼 찾아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그 감기가 오래 머무르지 않습니다. 옆에 기침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손수건을 내밀기도 합니다. 저도 마음의 감기가 올 것 같으면, 본능적으로 마음의 휴식공간을 찾아 나섭니다.

바로 "동네 한 바퀴"입니다.


제게 동네 한 바퀴만큼이나 마음에 안정을 주는 곳도 없는 것 같습니다. 가을이 한창인 무렵, 동네에는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있었습니다. 형형색색이라는 표현처럼 흰색부터 분홍색, 보라색, 자주색 꽃들이 너무 예뻤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분홍색도 연한 분홍색, 평범한 분홍색, 짙은 분홍색, 또 그라데이션이 있는 분홍색으로 꽃마다 색이 다 달랐습니다. 보라색도 자주색도 마찬가지였죠.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꽃들마다 색뿐만 아니라 모양도, 크기도 다 달랐습니다.


코스모스 향기


밤마실을 나서서 같은 길을 찾았습니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아도 코스모스 밭인지   있었습니다. 향기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코스모스 향기를 시나요? 향기를 꾸미는 말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은  같아요. 달콤한 향기, 은은한 향기, 오렌지 향기 그리고 "코스모스 향기". 그런데  말은 코스모스들이 들으면 굉장히 섭섭할  같아요. 왜냐하면  들마다 풍기는 향기가 다르기 때문이에요. 마치 코스모스 , 크기, 모양이 다른 것처럼요.


그리고 그 코스모스들 사이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저마다 다르기도 마찬가지였죠. 소리의 크기, 길이, 주파수 음역대로 인한 공기의 진동이 다릅니다.


이따금 우리는 그 차이를 느끼지만, 그 차이를 없애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가 너무 좋잖아요.


다시 찾은 12월의 코스모스


얼마 전 12월의 어느 날,  찬란했던 코스모스 밭을 다시 찾았습니다.

갈색의 무성한 풀들만 한 가득히 된 밭은 시간이 흐른 것을 보여줍니다.


박완서 작가님의 표현을 빌려보며 혼잣말을 합니다. "그 많던 코스모스는 다 어디로 갔을까?"

코스모스가 사라지면, 그 코스모스가 가지고 있던 아름다운 영혼도 사라져 버리는 걸까요? 어쩌면 제게 주었던 그 아름다움 들은 이렇게 고스란히 남겨져 있으니 영원히 남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색에 잠겨있던 저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갈색 풀더미 사이로 코스모스가 피어있었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어찌 혼자서 꽃을 피우고 있을 수 있을까요?

신기하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치 오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처럼 누군가 그려놓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제가 직접 찍은 "12월의 코스모스"입니다.

시계를 잘 못 봐서 좀 늦었습니다만 ㅎㅎ


색도, 크기도, 모양, 향기까지 저마다 달랐지만, 특별히 꽃이 피는 시간이 다른 친구를 발견했습니다.

이런 차이들은 제게 또 다른 사색을 선물합니다. 오늘은 그 "차이"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2] 세 가지 차이, 그리고 괴로움

하나. "실존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차이


저는 거울을 볼 때 가끔 굉장히 낯선 존재를 느낍니다.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우리는 거울을 보면서 자기 눈, 코, 입의 생김새를 살펴봅니다. 거울로 내 모습을 인식합니다. 하지만 내면의 자아는 거울에 비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지? 내 마음 상태는 어떠한지? 이런 것들은 거울을 들여다 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그래서 우리는 늘 우리 스스로를 인식하기 위해 말하고, 쓰고, 행동합니다. 그러면서 자아의 이미지를 인식해나갑니다. 그러나 가끔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나 인지, 아니면 실존하는 나의 자아의 모습인지 말이죠.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게 보이는 것처럼, 매일 변하는 나의 자아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

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 몸이 감기에 걸리고 컨디션이 안 좋을 때가 있는 것처럼, 내면의 자아도 감기에 걸리고 컨디션 난조가 찾아옵니다.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알려진 서산대사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八十年前渠是我(팔십년전거시아)
八十年後我是渠(팔십년후아시거)

한자로 쓰여있어서 어려워 보이지만 이런 말입니다.

"팔십 년 전에는 그것이 나였는데, 팔십 년 후에는 내가 그것이구나."

평생 ‘이것이 나다’라고 살아왔는데, 죽을 때 보니 ‘나’라는 것이 그저 허상에 불과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항상 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내가 되고 싶은 나와 지금의 나와의 차이" 만큼 괴로워합니다. 더 멋진 나, 더 건강한 나, 더 멋진 몸매를 가진, 재치 있게 말도 잘하고, 일도 똑 부러지게 하는, 작삼삼일 포기하는 삶이 아닌 강한 의지력을 가진 나


이처럼 실제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는 늘 차이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만큼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지금의 나보다 더 훌륭할 미래의 나에 집중하면서 지금의 나에게 소홀한 지 살펴봅니다.


코스모스의 색과 키가 다른 것처럼, 차이 자체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차이를 줄이려는 노력도 좋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차이에 집착하고, 차이를 줄이려는 욕심 그리고 또 다른 차이를 만들어내는 마음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둘. "실존하는 세상"과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차이


엄마, 노력하면 된다면서?!


높은 빌딩, 검은색 포장된 도로와 그것을 따라 보이는 불빛들, 거리에 종종걸음의 사람들

이런 것들은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관념들. 예를 들면 "노력", "정직"처럼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 있습니다. 또 열심히 노력한 사람에게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정직한 사람에게 복이 온다는 믿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을 살아갈수록, 실제 세상과 내가 생각하는 세상에는 차이가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이것을 "부조리"라고 말합니다.

실제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처럼, 실제 세상의 내가 생각하는 세상 사이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사회는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준다.", "모든 일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방법으로 진행된다." 우리가 만든 이상적인 개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 권선징악은 디즈니 만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은 유토피아, 낙원, 정토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완전히 알 수 없고, 모든 일을 완전히 해낼 수도 없으며, 반드시 죽기 마련이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영원'에 대한 환상을 품는다거나, 다가올 내일에 대해서 희망을 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미래를 위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해도, 결국 미래는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죽음을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시지프 신화』by 알베르 카뮈



셋. "그가 생각하는 세상"과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차이


같은 세계, 다른 세계관
Shared Universe, Different worldview

어벤저스 영화에는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스파이더맨, 블랙위도우, 블랙팬서 등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주인공들의 스토리에 대한 영화가 있습니다. 그들이 어벤저스 영화에서 한 데 모이는 걸로 봐서,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 살고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세계를 공유한다(Shared Universe)라고 합니다.


특히 마블 영화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라는 개념으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지만, 주인공마다 다른 세계관*(Different Worldview)으로 바라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연결했습니다.

세계관(世界觀, 영어: worldview)이란 어떤 지식이나 관점을 가지고 세계를 근본적으로 인식하는 방식이나 틀이다. 세계관은 자연 철학 즉 근본적이고 실존적이며 규범적인 원리와 함께 주제, 가치, 감정 및 윤리가 포함될 수 있다. - 위키백과 -


마블 주인공마다의 세계가 존재하고 영화가 개봉되는 것처럼, 우리도 같은 세상(Universe)에 살고 있지만 저마다의 세계관(Worldview)에 투영된 세상이 존재하고 나름대로의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저만의 세상을 만듭니다. 그렇게 60억 인구가 생각하는 세상은 최소 60억 개 이상이 됩니다. 그가 생각하는 세상과 내가 생각하는 세상에는 언제나 차이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3] "차이"가 "사이"가 되기까지

하나. 차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우리는 나이가 들고,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실제 세상을 다 많이 알아갑니다. 엄밀히 말하면 알아가려고 "노력" 합니다. 어느 순간, 지식이 깊어질수록 세상에 대해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세계관이 굳어지고 내가 아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같은 부분보다는 다른 부분을 찾아내는 것이 훨씬 더 쉬워집니다. 아이들은 친구에 열려있고 어른들은 친구에 닫혀 있는 이유입니다.


반대로 그렇게나 내 인생을 바쳐 알게 된 지식에 비해 세상은 무한합니다. 오히려 알면 알수록 세상의 모든 지식과 존재와 개념에 대해 겸손함이 커집니다. 세상은 넓고 사람들은 많고, 우리 인생은 그 세상을 다 알아가기엔 하루살이 같이 짧습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세상 모든 지식과 원리를 다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머리로 이해한 것 같아도 다른 견해와 다른 관점이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내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이해가 틀린 것이고, 그 관점에서 보면 내 이해는 틀린 것이 됩니다.


정리하면 ①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차이 ② 세상과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차이 ③ 내가 생각하는 세상과 그가 생각하는 세상의 차이

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공존할 수 있는 사이가 시작합니다.


둘. 차이는 줄이는 게 아니라 적당히 다가가는 것


차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인정했다면, 두 번째는 서로가 용인하는 만큼 다가가는 것입니다.

차이를 "좁힌다" 고 생각했다면, 아마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은 그림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우리의 괴로움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평등", "조화", "균형"이라는 개념은 항상 그러하다는 절대 명제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아닙니다. "현실은 대체로 그러하다"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릅니다.


다음 생각은 어떨까요?

차이를 좁히는 것은 어느 한 부분이, 어느 누가 먼저 일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평등하게, 균형 있게 이뤄지지 않습니다.

차이를 좁히기 위해 서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켜 바꾸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아침에 30분 일찍 일어나는 나로 변하기도, 매일 글을 쓴다는 약속을 지키기도, 커피 한잔을 줄인다는 다짐도 해내기도 어렵습니다. 가장 먼저 온전한 내가 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인 이유입니다.


차이는 반드시 줄여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코스모스 들처럼 있는 그대로가 아름다움입니다.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무조건 가까운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요.


마지막으로 앞서 살펴본 세 가지 차이에 대해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봅니다.

하나, 나를 키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자라나는데 집중한다.
둘, 내 세상과 이 세상의 차이에 대해 이해하고자 열린 마음으로 공부한다.
셋, 곁에 있는 그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이 대화한다.
차이에 대해 이해하는 학문이 참 흥미롭습니다.
한동안 깊은 사색의 시간과 동시에 가벼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주어진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감사히 또 흥미롭게 하루를 살아갑니다.
12월의 코스모스처럼 다채로운 삶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마음속에 남을 테니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