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론 껍질 위의 우리들
마트 과일 코너 앞에서 저는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습니다. 진열대에 놓인 멜론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40년 넘게 그냥 ‘껍질’로만 보이던 그 무늬가, 그날은 이상하게도 수많은 길처럼 보였습니다.
갈라지고, 이어지고, 다시 갈라지는 길들. 그리고 그 위에 내 모습.
나는 둥근 멜론 위에 서 있었다.
누군가 이미 만들어 놓은 수많은 선택의 길 위에서, 내년에는 다음 갈림길을 향해 걷고 있었습니다. 이 길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이 선택은… 전에도 했던 것 같은데. 입시, 취업, 승진, 평가,, 우리는 늘 선택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이미 그려진 길 위를 걷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가 주어진 대로, 환경이 시키는 대로,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말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다음 칸으로 이동해 온 것은 아닐까요?
멜론 껍질 안쪽의 달콤함은 상상만 한 채, 우리는 껍질 위의 길에서만 끝없는 선택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은 눈앞에 펼쳐진 또 다른 길이 아니라, 발밑에 이미 놓여 있는 무언가는 아닐까요?
정말로 나의 선택이었을까?
과일 이야기를 한 김에, 며칠 전 베트남 시장에서 일화를 덧붙여 볼까 합니다. 베트남의 어느 재래시장, 스무 살이 될까 말까 한 청년이 제게 말했습니다.
No sweat, No money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애플망고 하나를 집어 들더니, 제 코앞으로 조용히 가져왔습니다.
“노란 망고가 항상 단 건 아니에요." ("Yellow doesn't mean sweat.”)
가만히 코로 냄새를 맡아보니 알겠더라고요. 망고에서 올라오는 아주 미묘한 향, 그 스윗한 냄새 하나가 진짜 단 망고와 그렇지 않은 망고를 가르는 기준이었어요. 우리 가족은 청년이 골라준 망고 2kg를 그 자리에서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해치워버렸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색으로 판단하고 선택합니다. 외모와 옷차림, 명함과 직책, 성적표의 알파벳과 숫자,, 이런 색들은 눈에 잘 보이지만, 진짜는 아닐 수 있습니다. 정작 중요한 ‘향’을 맡아보는 일에는 서툴죠.
제게 스윗한 망고를 골라낼 수 있는 평생의 지혜를 선물한 베트남 청년을 존경합니다.
연말과 연초의 경계에 서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숫자를 바라보게 됩니다.
2025 그리고 2026
성적표와 인사평가 시트 위의 알파벳,
승진자 명단 속 이름,
SNS에 쌓인 좋아요의 개수들
그 숫자들은 분명 노력의 결과이고, 스스로에게 내밀 수 있는 작은 증명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신가요..?
이 모든 숫자가,
지금의 나를 정말 설명해 주고 있는 걸까?
잘 채워진 성적표, 기다리던 명단에 적힌 이름, 반응이 이어지는 SNS 바둑판. 우리는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며 한 해를 마무리합니다. 마치 망고의 냄새가 아닌 색을 바라보는 것처럼요.
그 순간만큼은 안도감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최소한 제게는 그랬습니다. 다음 목표는 무엇인가, 다음에 증명해야 할 것은 또 무엇일까.. 연말이 될수록 마음은 이상하게도 더 분주해집니다.
잘 나가던 선배, 임원의 퇴사, 또 누군가의 승진, 그리고 비워진 자리. 연말 회사의 풍경입니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스쳐갑니다. 가지고 온 거 하나 없이 이렇게 예쁜 아이들과 하나의 가정 이루고 지켜왔으면 되었다고, 수고했다고. 혼자서 닿지도 않는 등을 토닥거리며 하루를 시작하고 또 금세 마무리 합니다.
혼자서 닿지도 않는 등을 토닥거리며,
하루를 시작하고, 또 금세 마무리 합니다.
'이룬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원래 모든 것은 본래부터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의미는 우리가 부여하는 것이고, 그래서 삶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사실을, 연말에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됩니다.
연말은 평가의 시간이 아니라, 인정의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연초는 다짐의 시간이 아니라, 방향을 정하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누구에게나 고충은 있고, 쉽게 살아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도 충분히 애써오셨습니다. 그 사실 하나만은, 숫자로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제는 조금 더 나 다운 방향으로, 조금 더 숨 쉬기 편한 속도로, 새해를 맞이하셔도 좋겠습니다.
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고,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2025년은 정말 정신이 없었네요. 에세이도 함께 하지 못했는데도, 동료 작가님들 늘 응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