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하려는 그 위로, 몇 초짜리인가요?
누구에게도 별 일 아닌 일은 없다. 저마다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산다. 우리는 얼마나 "말"로 다른 이에게 상처를 받고, 또 상처를 받는가? 그래서인지 요즘 친구들은 맞지 않는 사람과 굳이 말을 오래 하지 않는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의 변화이기도 하다. 우리는 늘 여기저기서 상처를 받았다며 그 말들을 곱씹어 보며 상처를 키운다. 반면 상처를 준 적이 있냐는 질문에는 "글쎄요.."이다. 누가 운동장에다가 우리를 몰아놓고 확성기로 "여기 상처 있습니다"라고 한 걸까?
요즘은 힘 희롱이다, 갑질이다 많은 사회적 이슈로 직장에서 상처 받는 일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하지만 회사도 일보다는 사람이 힘들다는 것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겨우겨우 하루를 살아낸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만원 버스에, 지하철에 한 시간이나 짐짝처럼 지친 몸을 맡긴다. 내가 남에게 기분 좋은 말을 한다면, 내가 기분 좋은 말을 들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보통 상처는 마음이 건강하거나 별일 없을 때는 훌훌 털어버린다. 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거나, 사랑하는 가족이 아프거나 심지어 잃게 된 상황일 수도 있다. 그녀가 감당하기에 큰 고통이나 아픔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상처가 깊다. 상처라는 것은 살갗을 보호하고 있던 피부가 베이거나 찢어짐 이상의 무방비 상태이다. 이때 잘 못된 말은 상처에 세균이 된다. 더 악화되거나 상처에 함께 남을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아파할 때 하는 위로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위로도 잘못하면 상처가 된다.
모든 걸 다 바친 직장생활의 승진에서 탈락했을 때, 위로받은 일이 있다.
"정 과장보다 아까운 사람들도 많았어요"
(네가 지금 치고 있는 거? "미" 같은데?)
"미안하다. 내가 더 챙겨줬어야 하는데"
(순간 팀장님이 평가 안 하신 줄 오해했습니다)
특히나 몇 년 내지는 평생에 노력과 상처에 대해 타인은 단 몇 초동안 생각해본다. 한 3초 정도.
3초짜리 싸구려 말로 상처를 감쌀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고 착각하지 말자.
힘낼지 말지는 본인 스스로가 정한다. 사실 우리는 "힘내"라는 위로의 말은 왠지 우리 기분마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듣고 싶지 않다.
사실 위로의 말은 굳이 필요하지는 않다. '누가 나 좀 와서 위로해주세요~'라고 구걸하고 다니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그 위로가 효과적 일리도 없다. 왜냐하면 위로도 상처와 마찬가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위로는 그의 이야기를,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위로하고 싶으면 아무 말 말고 들어주자.
주제넘게 몇 초밖에 안 걸린 생각 안 한 말을 내뱉지는 말자.
으어어 엉엉
엄마에게 혼난 아들이 서럽게 울었다. 또 사단이 났구나..
사랑하는 엄마에게 귀여움만 받을 줄 알았건만 상심이 큰 듯하다. 난 그럴 때마다 그냥 안아준다. 혼자 있고 싶을 때는 내버려 둔다. 우리는 탄력 회복성이 있어 언젠가는 감정이 수그러들기에. 근사한 탄력 회복성이라는 말보다는 그냥 시간이 가면서 감정도 흘러갔기 때문이지 않나.
마음을 추스르고 도움이 필요하면 그가 먼저 문을 열고 나올 것이다. 그럼 그때 다시 반갑게 맞이하고 이야기할 힘이 생겼을 때 들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지나서 생각해보면 상처는 내가 받은 것이었다. 난 그 말들을 생각날 때마다 꺼내보았다.
정작 2차 가해를 한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우리는 싸구려 위로에 덤덤해질 필요가 있다.
상처 받은 말이 수학 공부라고 영어단어라고 생각해보자. 기억하고 싶어도 멀어져 갈 것이다.
∫ Σ (log n x cos θ) x ∫Σ n x (e ^ 상처) x tan θ
상처에 exponential을 한 다음에 sigma를 씌우고 인티그랄 ㅈㄹ 씌워서 n을 무한대(∞)로 보내버려!
자 이제 됐죠? 가만,, 이러면 상처가 커지는 듯...하
아무튼 상처, 주지도 받지도 말자고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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