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경문 Oct 20. 2021

왜 우리는 바퀴벌레 초콜릿을 먹지 못할까?

행복에는 베짱이 아닌 배짱이 필요하다

하나. 왜 우리는 바퀴벌레를 먹지 못할까?


어떤 초콜릿을 먹고 싶냐고 하면,

대다수는 보기 좋은 예쁜 초콜릿을 선택합니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우리들을 경악하게 하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바로 일반석 객실의 대다수 사람들이 바퀴벌레로 제조된 단백질 바를 먹는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바퀴벌레를 먹지 못할까요?

가령, 초멸균 상태로 바퀴벌레를 양식했습니다.(Germ Free 무세균)

호텔식 조리법을 사용하여 요리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바퀴벌레를 드시겠습니까?


바퀴벌레는 이성적으로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동물적 경험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과 입, 촉감 등이 뇌로 전달되어 동물적으로 바퀴벌레를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그럴듯한 이유를 이성적으로 내 행동의 결과에 갖다 붙여 설명합니다.


바퀴벌레에 대한 "불쾌"의 감정은 수백만 년 동안 우리 인류 조상으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다음 사진을 보면 좀 더 명확해집니다.



둘.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 도구이다.


인류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는 600만 년 전부터 생존을 거듭해 왔기에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인류는 생존에 대한 동물적 감각을 뇌에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후대에 DNA로 전파되어 왔습니다.


만약 진심으로 왼쪽 그림을 더 선호하는 DNA가 있다면, 그 유전자는 우리까지 전달되지 않고 멸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왜냐하면 생존의 생존을 거듭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무의식적으로 동물적으로, 반사적으로 쾌와 불쾌의 감정을 느낍니다.

불쾌 : 다침, 피, 고통, 더러움, 죽은 생물, 추위, 위험  → 죽음 → STOP

쾌 : 깨끗함, 물, 숲, 햇살, 따뜻함, 새 생명, 예쁨 → 생존 → OK
                                                                                                『'행복의 기원'의 저자, 서은국 교수』


인류는 생존하는 과정에서 쾌와 불쾌를 순간순간 느끼면서 살아왔습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아무도 불쾌에서 행복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편안함과 따뜻한 과 같은 쾌의 상태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순간순간 느껴지는 쾌와 불쾌는 결국 "생존을 위해 가동되는 일종의 signal"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많은 철학자 들에 의해 오해가 생겼습니다.


행복은 삶의 최종 목적이다.


이때부터 인간은 불행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난 삶의 최종 목적을 이루지 못했어.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평생 품은 채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 당시는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과학적 지식이 매우 부족한 "기원전 330년경"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21년 + 330년 = 2350년도 더 된 옛날의 명제가 인간은 존엄한 존재라는 철학자들의 논리로 진리가 굳어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입니다.

생존과 재상산(번식)의 과정에서 자연스레 발생하는 "괜찮아, 살았어"라는 일종의 OK, GO signal입니다.


괜찮아 한번 해봐 라고 한다면 행복한 환경이 됩니다.

반면 안돼 하지 마 위험해라는 STOP signal이 나오는 환경은 불행해집니다.


우리 사회를 우리 가정을 그리고 나의 생각을 되돌아봅니다.

안돼. 위험해. 하지마.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옳아 메고 있지 않나요?



셋.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이다.

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intensity


이제 아프리카 대륙의 몇몇 국가를 제외한 인류는 생존하기 위해 살지는 않습니다.

대신 인간사회는 환호, 목표 달성, 우러러봄 등의 좀 복잡한 것 들을 만들었습니다.


로켓 발사 성공, 올림픽 금메달부터 직장에서 과장 승진, 주식 상한가, 부동산 폭등

이러한 경험에서 오는 감정을 얻기 위해 어떤 이들은 10년 그 이상을 참고 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도 오랜 시간 참는다고 해서 그 행복이 평생 가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원하던 과장 승진이 되었다고 평생 기쁘다면 그는 만년 과장으로 살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또 새 차를 산 기쁨도 3일이면 없어집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좀 더 갈 수도 있겠죠


심지어 비트코인이나 부동산이 대박이 났다고 해서 그 돈을 전부 가지고 하와이로 떠난다고 해서 평생 행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 이후에는 좀 더 큰 행복(쾌)의 감정을 쫓게 됩니다.


결국 일상에서의 작은 즐거움을 놓친다면, 그 이상의 더 큰 행복이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려서 맛있는 간식을 사다가 먹는, 흔히 요즘 말하는 소확행이 아마도 그런 거라고 생각됩니다.



넷. 우리 사회는 신뢰의 Signal을 주는가? 나는?


미국 사회에서 성인 사망 요인 1위는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사회적 고립"이라고 합니다.


사망 요인 1위인 암도 통계적으로 혼자인 사람이 많이 걸린다고 합니다. 또 암에 걸린 사람이라도 옆에 아무도 없는 사람일수록 회복 가능성이 더 낮다고 합니다. 알코올도 흡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회는 야생동물과 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울타리였고 배고플 때 식량을 나누는 무리였습니다.

반대로 고립, 외로움과 고독은 인류에게 죽음의 Signal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뇌는 사회가 꼭 필요하다고 인식되었고 인간에 중독이 되었습니다.


살면서 제일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무엇입니까?



곰곰이 생각해보고 답을 해주세요

그러면 하나같이 '사람과 관련된 사건'이었을 겁니다.


다리를 다쳤거나 수술을 했던 기억이 아니라

어렸을 적 상처를 받았거나 사랑하는 인연과 헤어졌거나, 군에서 선임이 가혹행위를 했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던 기억 같은 것들요. 사회에서 주는 안정과 반대로 이제는 사회가 인간을 공격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사람들을 필연적으로 만납니다.

그 사람들이 어떤가에 따라 행복의 감정이 자주 올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서로 신뢰하고 즐거움을 주고, 도움을 주는 관계가 많다면 행복하고

상대방을 신고하고, 경쟁하고, 나쁜 짓을 할까 경계한다면 불행할 것입니다.


나는 신뢰를 주고 즐거움을 주는 사람인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고통을 주는 관계는 최소한으로 접촉을 피하도록 일상을 설계하면 좋겠습니다.



이전 11화 아빠, 왜 디즈니 영화는 노래를 불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